HP·도요타의 추락…그들은 왜 무너졌을까

 

세계 최대의 기업들이 한순간에 사업을 접는 세상이다. 애플의 도약, 소니의 추락, 코닥의 파산…. 기업의 운명은 왜 갈렸을까.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공을 이뤘던 분야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라져 가는 기업들이 상당수다. 급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삼성전자, 현대차 등 세계 시장에서 활약하는 한국의 기업들도 이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영원할 것 같던 로마제국은 결국 망했다. 지배층의 부패와 위기에 눈감는 착각, 외부 세력에 대한 의존 등이 그 이유였다. 세계를 주름잡던 기업들이 무대에서 초라하게 내려오고 있다. 변화하는 시류를 타지 못하거나 악화되는 경영 환경 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한 글로벌 업체가 많다. 특히 연구개발(R&D) 투자, 기술 혁신 등 ‘파괴적 혁신’을 등한시 한 채 기존 시장과 고객을 유지하는 ‘존속적 혁신’에만 매달려 생사의 기로에 선 업계 ‘거목’들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도 여차하면 이들 기업의 전철(前轍)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대두됐다. 그렇다면 급박하게 돌아가는 어려운 경제 환경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 기업은 이들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대규모 리콜 사태에 휘말리며 그동안 쌓아온 아성이 무너졌다. 도요타의 자동차 생산공장의 모습.

 

변화하는 시장 간파 못한 HP·노키아의 끝없는 추락

한 때 실리콘밸리 정보기술(IT) 혁신의 상징이자 세계 IT 업계의 정점에 섰던 HP는 지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HP의 2012회계연도 1분기(2011년 11월∼2012년 1월) 순이익은 전년 동기대비 44% 급감했다. 매출도 7% 감소했다. 주력 분야인 PC와 프린터 사업 부진의 영향이 컸다. 2분기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순익은 31%, 매출은 3% 감소했다. 세계 100대 브랜드 기업 순위에서도 1년 만에 8계단이나 미끄러지며 26위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맥 휘트먼 HP CEO는 2014회계연도까지 2만7000명의 인력을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즈는 HP의 몰락 이유에 대해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 잇따른 M&A로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으나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M&A가 성공하지 못한 원인으로 시장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해 한발 늦게 뛰어들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예컨대 애플이 2001년 1월 음악재생 및 아이팟(MP3 플레이어) 관리 프로그램 ‘아이튠즈’를 론칭한 후 그해 10월 아이팟을 발표한 반면, HP는 몇 달 뒤 동종 업체인 컴팩을 인수했다. 애플이 파괴적 혁신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때 HP는 기존 시장에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존속적 혁신에 머물렀던 것이다.

세계 컴퓨터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미국 IBM사. 지금은 살아났지만 1990년대 초 파산 일보직전까지 갔던 IBM의 추락 속도는 급속했다. 1992년 연간 적자폭이 무려 49억7000만달러(약 5조5200억원)로 美 업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같은 해 4/4분기 중 손해액은 감원과 감량 경영에 따른 비용으로 인해 무려 54억6000만달러(5조9300억원)에 달했다.

경영과 기술면에서 세계 기업 중 모범이었던 IBM의 급속한 몰락은 미국 첨단산업 분야의 세대 교체를 의미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거대 우량 기업을 상징하는 ‘빅 블루’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해가 질것 같지 않았던 IBM의 몰락 이유로는 초대형 기업이 흔히 그렇듯 과거의 관료주의적 타성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더구나 컴퓨터처럼 하루가 다르게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첨단산업에서 과거 독점을 누리던 안일함에 젖어 변화의 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왕국의 몰락을 초래한 것이다.

지난 1964년 IBM이 중형 컴퓨터 360을 선보였을 때 미국의 경제지 ‘포춘’은 “현대사에서 가장 모험적인 경영판단”이라고 평가했던 것을 상기하면 IBM이 컴퓨터 업계의 흐름을 잘못 판단해 개인용 소형 PC의 출현을 경시하고 대형 컴퓨터로 버티려다 낙오된 건 첨단 정보산업계의 냉혹한 현실을 말해준다.

휴대전화 판매 1위로 세계를 호령했던 핀란드의 자존심 노키아의 굴욕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했던 노키아가 이젠 자금난에 시달리다 못해 본사 건물까지 매각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노키아는 지난 9월 출시한 플래그십 스마트폰 루미아920의 판매가 부진한 가운데 스마트폰 업계 7위로 추락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최근 노키아의 지난 3분기 스마트폰 판매량이 720만대로 세계 7위에 머물렀다고 밝혔다. 노키아는 지난 2분기에 삼성전자와 애플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와 애플, 구글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휴대전화에 집중한 노키아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 방식 휴대전화를 만들어 1992년 시장에 선보였고 이른바 ‘노키아 신화’는 이후 20년간 지속됐다. 그런 노키아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변화에 대한 적응의 실패 영향이 컸다. 휴대전화 시장에서 오랫동안 최강자로 군림하다 보니 자만심이 커져 스마트폰이 출시됐을 때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했고, 기존 제품에 대한 집착으로 고객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애플의 아이폰이 출시됐을 때도 노키아는 청각적인 기능만 생각하고 시각적인 기능이 중시되는 변화를 간과하고 만다.

또 시장점유율 1위 유지를 위해 ‘노키아 방식’을 고집한 것도 패인이다. 새로운 기술보다는 부품의 가격에 신경쓰다 보니, 저가 판매가 계속되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게 된 것이었다.

 

노키아의 휴대전화

무리한 해외 확장으로 무너진 도요타 품질 신화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수년간 추락을 거듭했던 일본 도요타자동차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품질 신화의 자부심’으로 세계 자동차업계 1위를 지켜온 도요타자동차.

도요타는 극한적 원가 절감을 추구하는 ‘가이젠’ 신화를 바탕으로 2008년 부동의 1위였던 GM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자동차 회사에 올랐다.

제조공정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해 제품 및 제조공정 전반에 걸쳐 비용을 계통적으로 절감시키는 도요타생산방식은 1980년대 미국 MIT(메사추세츠공과대학) 연구진이 소위 ‘린(Lean)’ 생산방식으로 일반화해 전 세계적의 생산공장에서 하나의 교본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러나 2010년 대규모 리콜 사태에 휘말리며 그동안 쌓아온 아성이 무너졌다.

북미 지역의 800만 대를 포함해 전 세계에서 약 1000만 대를 리콜했다. 도요타 측은 글로벌시장에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품질하자라며 대수롭잖게 여겼다. 차량 품질에 대한 문제 제기 수준을 넘어 회사가 결함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무시, 은폐해 왔다는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이 사태의 결정적 요인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해외사업 확장에만 치중하다가 품질 관리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란 평가다.

2000년대 들어 미국에서의 판매 확대를 위해 생산공장을 급속히 늘리면서 ‘도요타 품질’이 유지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들 해외 공장에선 비용 절감을 위해 상당수 부품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여기서 품질관리에 차질이 빚어졌다. 비용 절감을 위해 부품 공용화를 확대한 것도 문제가 됐다. 글로벌 양산 체제 구축과 안전·품질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세계 1위를 추구했던 도요타는 자신을 정상으로 끌어올린 규모에 대한 집착이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패착이 되는 역설에 직면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도요타 특유의 폐쇄적인 기업문화는 인화 단결과 내부 혁신에서는 강점을 발휘했지만 외부 고객의 불만을 경청하고 신속히 문제를 해결하도록 책임지는 위기 관리에서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도요타 리콜사태가 과도한 비용 절감과 치열해진 글로벌 경쟁의 한 결과물인 점을 감안할 때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사태가 닥쳐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노키아, 코닥, 소니는 변화된 기업 환경 흐름을 타지 못하고 안주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한국, 도태된 일본 기업들 뒤따라갈 우려 제기

한 때 삼성전자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일본의 거대 전자 기업들도 2000년 이후에 그들 기업가치의 거의 60%를 날려버렸다. 현재 일본 5대 전자회사 NEC, 파나소닉, 후지츠, 샤프, 소니의 시가총액을 모두 합쳐도 70조원 정도다. 삼성의 시가총액은 3배에 달하는 190조 수준. 일본이 지금 느끼는 굴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일본이 지난 1월 사상 최대의 적자를 낸 것과 관련해 일본 경제 부진의 근본 원인이 기업 경쟁력 약화에 있으며, 한국도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 것. LG경제연구원은 ‘일본 기업의 실패와 성공의 교훈’ 보고서에서 일본 기업들이 1990년대 성장 변곡점에서 혁신을 추구했지만 방향을 잘못 잡아 무너졌고, 디지털화 트렌드에 편승하지 못하고 기존 기술을 개량하는 데만 안주해 제품의 진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주목할 점은 1990년대 일본의 경제 상황이 현재 한국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정치권에서 나오고 있는 ‘재벌세’ ‘경제민주화’ ‘FTA 원상 복귀’ 등은 기업의 비용 부담을 높이는 정책들로 한국도 기업을 묶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본경제 전문가인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지난 2월 삼성사장단협의회 수요회의 강연을 통해 “엔고, 전력 부족, 높은 법인세, 많은 고용 규제, FTA 선점 실패 등 6중고를 겪고 있다”며 “일본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한국은 오히려 이를 따라가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 기업들의 침몰은 한국에도 강 건너 불 같은 얘기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일본 사례를 포함해 HP, 노키아 등 시장에서 추락한 기업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올바른 방향으로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원희 수석연구원은 “장기불황 속에서 선전하는 일본 기업들은 사업구조를 바꾸고 해외 진출을 강화한 공통점이 있다”며 “지금 삼성전자, 현대차가 잘 나가고 있다 하더라도 호황이 지속되기 쉽지 않으므로 기존 사업에 의존하지 말고 계속 다른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 이와 함께 내실을 다지는 데도 소홀이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삼성전자의 경우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 호황에 기댄 효과 크다”며 “중국, 대만 등에서 저가 스마트폰이 출시되면 고수익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가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스마트폰 의존도가 높은 이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소니·코닥, 그들은 어떻게 무너졌나
가전왕국으로 불렸던 일본 소니는 과거에 집착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우위를 차지한 브라운관 TV에 집착하다 평판TV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고 ‘워크맨’에 집착한 나머지 애플 ‘아이팟’에 시장을 빼앗겼다. R&D에도 집중해 봤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기술적 과제에만 매달리다 보니 기술특허가 상품 개발로 연결되지 못했다. 옛날 영광에 도취해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혁신을 외면한 대가였다.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미국 코닥도 지난 1월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롤필름 컬러필름 코닥카메라와 같은 독보적 기술 개발을 주도해 ‘필름 제국’으로 우뚝 선 코닥. 1970년대 미국 필름 시장의 90%, 카메라 시장의 85%를 점유했던 132년 전통의 이 기업은 1975년에 일찌감치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개발하고도 세계 시장의 3분의 2를 장악한 필름사업에 안주했다.

그 결과,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기술을 요구하는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은 물론 회사가 잘 나갈 때 다양한 분야에 투자해 미래 성장 동력을 개발하지 않은 탓에 치명타를 맞았다. 일찌감치 디지털카메라·복사기 등으로 사업 다각화에 성공한 후지필름이 아직 건재한 것과는 정반대다. ‘성(城)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옛말이 새삼 중요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