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글로벌 경제가 코로나19로 요동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끝의 시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이에 따른 사업과 시장의 변화로 각 기업들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벌어지고 있는 초대형 인수합병에 업계의 시선이 집중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판 자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 기업들의 정신없는 합종연횡이 벌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출처=갈무리
출처=갈무리

반도체 업계...AI로 뭉치다
8일 업계 및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인수합병 규모는 무려 1150억달러에 이른다. 지난해 대비 265%나 급증한 수치다.

업계에서는 지금의 반도체 업계 시장 재편을 지난 2015년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 '붐'과 비교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당시 118억달러 규모로 단행된 NXP의 프리스케일 인수, 370억달러의 아바고의 브로드컴 인수, 190억달러로 진행된 웨스턴디지털의 샌디스크 인수 등이 있었다. 총 1077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시장 인수합병이 단행된 가운데 2015년 재편의 핵심은 말 그대로 '기술확보'에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20년의 분위기는 다르다. AI를 중심에 두고 코로나19 정국을 관통하며 변화된 시장의 트렌드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절대강자 인텔이 흔들리는 가운데 오랫동안 인텔의 왕좌를 탐내던 이들이 시장의 균열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엔비디아가 영국의 암(Arm)을 품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9월 젠슨 황 CEO가 이끄는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의 암을 400억달러에 인수했으며, 이를 통해 AI 반도체의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GPU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엔비디아는 최근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게 됐다.

AMD가 통신 인프라 사업 진출을 위해 자일링스를 350억달러에 인수한 장면도 눈길을 끈다. 자일링스 주주들이 주식 1주당 1.7234주의 AMD 주식을 받는다는 설명이다. 총괄 CEO는 AMD의 사령탑인 리사 수가 맡으며 빅터 펭 자일링스 CEO는 신사업과 전략 등을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일링스는 1984년 탄생한 FPGA 전문 업체다. 최근 인공지능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며 FPGA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유연한 시제품 출시 및 특수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5G 인프라부터 군수까지 강력한 스펙트럼을 보유하고 있다.

리사 수 AMD CEO. 출처=갈무리
리사 수 AMD CEO. 출처=갈무리

이를 바탕으로 AMD의 영토가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기존 영역이 자일링스라는 특수 반도체를 만나 다양한 산업 전반으로 퍼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군수부터 5G 인프라까지 특수 반도체의 쓰임새가 많아짐에 따라 자일링스의 특수 반도체 인프라가 AMD의 기반 인프라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도 한 칼을 빼들었다. AI 반도체와는 거리가 있지만 낸드플래시 강화를 위해 지난 10월 20일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을 90억달러에 인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반도체 중 특히 D램 점유율 세계 2위(2019년 연간 기준, 2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강점을 보유하고 있으나 낸드플래시 부문에서는 시계시장 점유율 4위~5위권에 머무르는 등 D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신의 한 수 라는 말이 나온다.

물론 2020년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 인수합병 전선이 무난하게 추진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당장 중국을 중심으로 각 국의 규제당국이 미국 중심의 반도체 패권을 우려해 강력한 견제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 상황에서는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가능성 타진이 시장의 재편을 끌어내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질 경우 또 한 번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 2015년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 '불장'이 선 후 메모리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왔다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 연장선에서 AI 반도체 비전이라는 트렌드가 전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다시 한 번 슈퍼 사이클의 흐름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에 따르면 AI 반도체 시장은 2018년 약 7조8000원에서 2024년 약 50조원으로 연평균 36%의 가파른 성장이 예상된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반도체 시장은 기존 GPU 중심 시장에서 AI 반도체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SKT의 AI반도체. 출처=SKT
SKT의 AI반도체. 출처=SKT

최태원, 그리고 구광모 회장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재편이 빨라지면서 국내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그리고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넥스트 스텝'에도 주목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SK하이닉스를 일궈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한 때 잉여의 몸으로 운신의 폭이 제한됐으나, 출소와 함께 일본 도시바 메모리(키옥시아) 지분 투자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며 관련 사업을 진두지휘한 적도 있다.

그 연장선에서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하는 한편,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이 인사를 통해 SK하이닉스 부회장을 겸임한 장면이 눈길을 끈다. 지난 SK하이닉스 인수전 당시 큰 역할을 한 박 부회장을 통해 최태원 회장이 또 한 번 반도체 신화를 꿈꿀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SK텔레콤이 최근 AI 반도체의 큰 꿈을 꾸고있는 장면이 더욱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SK텔레콤은 지난달 25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한국판 뉴딜, 대한민국 인공지능을 만나다’에서 자체 개발한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SAPEON X220’을 전격 공개했다. 지난 4월 ETRI와 공동 연구로 서버용 초저전력 AI 반도체 ‘AB9(알데바란)’을 개발하는 한편 ‘서버용 차세대 지능형(AI) 반도체 기술 개발’ 사업까지 수주해 SK하이닉스, 서울대, 전자부품연구원(KETI) 등 15개 대중소기업·대학·출연연과 함께 8년짜리 사업을 이끌던 실력이 SAPEON X220으로 집중되는 분위기다.

SK텔레콤은 AI에 최적화된 반도체로 GPU와 경쟁할 계획이다. SK텔레콤은 “SAPEON X220은 기존 GPU(그래픽처리장치) 대비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하다”면서 “GPU 대비 딥러닝 연산 속도가 1.5배 빠르기 때문에 데이터센터에 적용 시 데이터 처리 용량이 1.5배 증가한다. 동시에, 가격은 GPU의 절반 수준이고 전력 사용량도 80%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자사의 AI 서비스 누구(NUGU), 슈퍼노바(Supernova), 티뷰(Tview) 그리고 ADT캡스 등 SK ICT 패밀리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AI 반도체 적용 확대에 나설 예정이다. SK텔레콤 김윤 CTO는 “국내 최초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출시는 SKT의 기술력과 서비스 역량,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중소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이뤄낸 쾌거”라며 “향후 AI 반도체와 SKT가 보유한 AI, 5G, 클라우드 등 기술을 접목해 글로벌 톱 수준의 AI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연장선에서 SK텔레콤 및 SK하이닉스 등이 새로운 인수합병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한편 구광모 LG그룹 회장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LG는 한 때 LG반도체를 통해 큰 꿈을 꿨으나 정부 정책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장에서 손을 뗀 경험이 있다. 이후 모바일 AP는 자체 제작을 포기했으며 AI에 있어서도 씽큐라는 독자적인 브랜드가 있지만 대부분 아마존 및 구글에 의존하는 형태다.

이런 가운데 최근 계열분리를 통해 선택과 집중을 단행하는 한편 연말인사를 통해 완벽한 구광모 회장 친정체제를 구축한 점이 눈길을 끈다. 나아가 구 회장이 달라진 LG를 통해 AI에 전사적인 집중에 나서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LG AI연구원이 7일 출범한 점이 중요하다.

LG 마곡 사이언스 파크가 선대 회장의 손에서 태어난 LG그룹 전체의 기술 연구개발의 총아라면, LG AI연구원은 구광모 현 회장의 비전이자 LG의 AI 전략을 새롭게 정립할 일종의 승부수로 평가받는다. 그룹 차원의 최신 AI 원천기술 확보 및 AI 난제 해결 역할을 수행하는 AI 전담조직이며 세계적인 AI 석학이자 구글의 AI 연구조직 ‘구글 브레인’에서 리서치 사이언티스트를 역임한 이홍락 미국 미시건 대학교 교수(77년생)를 영입했다.

업계에서는 LG AI연구원이 LG그룹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LG테크놀로지벤처스와 함께 다양한 가능성 타진에 나설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중심에서 AI반도체에 대한 명확한 그림, 나아가 인수합병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최근 인사를 통해 이충섭 CS 상무가 최근 LG전자로 영입된 가운데, 이 상무가 IB업계에서 인수합병 전문가로 활동한 인사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LG에너지솔루션 분할 및 상장에 대비한 인사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지만 이 상무가 큰 틀에서 다양한 영역의 인수합병을 진두지휘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출처=LG
출처=LG

반도체 뿐이겠느냐
반도체 업계만 인수합병이 활발한 것은 아니다.

최근 빌 폴리가 세운 기업인수목적(SPAC) 기업 폴리 트레즈민이 블랙스톤과 CVC캐피탈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선불 온라인 카드업체인 페이세이프를 90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크레디트스위스와 UBS의 합병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 또 하나의 '메가딜'이 달성된 셈이다.

코카콜라유러피언파트너스(CCEP)는 호주 코카콜라아마틸을 66억달러에 품었고 미국 1위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도 사이먼앤드슈스터를 22억달러에 확보한다고 밝혔다. 세븐앤드아이도 미국 편의점인 스피드웨이를 품었다.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시장 재편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타진한 다양한 실험이 벌어지는 셈이다. 특히 강력한 양적완화 기조에서 포스트 코로나를 제대로 장악하기 위한 각 기업의 '인수합병 후각'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