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염곡사거리에서 바라본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사옥.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20일 오전 염곡사거리에서 바라본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사옥.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이코노믹리뷰=최동훈 기자] 영상 4도, 미세먼지 좋음, 흐림.

기아자동차 노조가 20일 오전 10시 사측에 항의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던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날씨다. 봄 지나 첫눈이 내리는 절기 ‘소설’을 이틀 앞둔 이날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 본사 정문 앞은 쌀쌀할 뿐 아니라 굴러다니는 낙엽들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전국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의 간부와 조합원들이 각자 머리에 두른 띠는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현대차그룹 본사 정문을 맞은편에서 바라본 모습. 전국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의 2020 임단협 투쟁 시위가 진행되기 전 현장 관계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현대차그룹 본사 정문을 맞은편에서 바라본 모습. 전국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의 2020 임단협 투쟁 시위가 진행되기 전 현장 관계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최종태 기아차지부 지부장을 비롯해 40명 정도의 노조 구성원들은 현재 답보상태를 보이고 있는 2020년 임금 및 단체 협상 과정에 대해 사측에 항의하기 위해 본사 앞에 와 있었다.

본사 앞 길가엔 경찰 버스가 대형 2대, 중형 1대씩 총 3대 주차돼 있었다. 스타렉스, 투싼, 쏘나타 등 현대차 차량을 개조한 경찰차도 대기하고 있었다. 일부 기아차 노조 간부들은 신형 카니발을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대차그룹에서 만들어진 차들이 현대차그룹 내 갈등의 현장에 투입돼 있는, 묘한 장면이었다.

기아차 노사는 올해 임단협에서 좀처럼 이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가 해마다 보여주는 모습이지만 이번 기아차 노조의 행보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올해 초 창궐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전세계 완성차 시장이 침체된 가운데, 기아차 노사가 갈등을 이어가며 제살 깎아먹는 사태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룹 내 같은 완성차 업체 현대자동차 노사가 지난 20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11년 만에 올해 임단협에서 임금 동결에 합의한 점은 기아차 노사의 갈등 양상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기아차 노조는 이날 현장에서 사측에 각종 안건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내용의 발언을 한 뒤 관련 내용을 담은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노조가 사측에 수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사안은 정년연장, 파워트레인(PT)부문 고용 보장, 잔업 복원 등 세 가지다.

최종태 기아차지부 지부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이 집행부 간부들과 구호를 외치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최종태 기아차지부 지부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이 집행부 간부들과 구호를 외치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최종태 지부장은 이날 현장에서 당초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던 시각 10시보다 5분 가량 앞당긴 9시 55분께 모두 발언을 시작했다. 대본 한쪽 없이 그를 둘러싼 취재진이나 현장 관계자들의 눈을 일일이 마주치며 2분 35분 가량 시간 동안 사측을 성토했다. 그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는 기자의 손이 추위에 덜덜 떨릴 지경이었지만, 최 지부장은 떨림없이 분명한 발음을 들려줬다.

최 지부장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노동자가 잘 살려면 노동조합에 가입하라’라고 말했다”며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어느 시대에도 온전한 삶이 허락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투쟁하지 않으면 (경영진은) 응답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유행병 사태로 경제 주체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투쟁하는 것을 바라보는 외부의 비판 또는 우려 섞인 시선을 의식한 듯한 말이었다.

그는 이어 “올해는 기아차 노조 설립 60주년, 전태일 열사 추모 50주년 등을 맞은 뜻깊은 해이지만 여전히 기업은 천문학적 이익을 거두고도 이를 (노조와) 공정히 나누려 하지 않는다”라며 “이제는 노동자가 투쟁하지 않아도 공정한 분배가 이뤄져야 하지 않겠나. 오늘을 기점으로 기아차 노사의 관계가 다시 한번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종태 지부장(맨 앞)이 삭발을 끝내고 집행부 간부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최종태 지부장(맨 앞)이 삭발을 끝내고 집행부 간부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기아차 노조 “투쟁 않는 노동자에 온전한 삶 불허”

최 지부장은 모두 발언을 끝낸 뒤 준비해온 기자회견문을 지회장들과 함께 내용별로 나눠 낭독했다. 박정우 소하지회장, 신종배 화성지회장, 박봉주 광주지회장, 김진성 판매지회장, 천용현 정비지회장 등 5명이 최 지부장 다음으로 기자회견문을 강한 어조로 읽어 내려갔다.

모두 얇은 재질의 긴팔 셔츠에 기아차지부가 적혀 있는 조끼만 걸치고 있어 보기에도 추워보였지만 목소리를 떨거나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기자회견문이 쓰인 종이를 들고 있는 맨손들이 모두 거칠었다.

8분 가까이 이어진 낭독 순서가 끝나고 바로 최 지부장의 삭발식이 진행됐다. 3명의 간부가 서있던 구역 중앙에 플라스틱 의자를 두고 최 지부장을 앉힌 뒤 기아차지부가 쓰인 현수막으로 그의 몸을 감쌌다. 머리카락이 최 지부장 옷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 간부가 이발기로 4분만에 최 지부장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냈다. 최 지부장의 이발이 진행되는 동안 노조 관계자들은 구호를 외치는 등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발을 모두 마친 뒤 두상이 드러난 최 지부장의 광대는 더욱 도드라지고 볼은 더욱 움푹 패여 보였다. 삭발을 끝낸 지부장은 앞서 언급한 요구사항을 되짚었다.

최 지부장은 “우리(노조)는 오늘 정의선 회장과 송호성 회장에 우리 입장을 분명히 전달했다”며 “노동자는 현재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할 준비를 마쳤다. 사측 최고경영자들은 노동자를 동등한 이사회 회사의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입장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 노조는 지난 19일 제2차 쟁의대책위원회를 연 뒤 오는 24~27일 부분파업을 하루 8시간씩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오는 월요일까지 남은 기간 동안 사측과 진전된 내용의 의견을 나눌 경우 철회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노조가 사측과 지속 소통할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기아차 노조 시위가 끝난 뒤 최종태 지부장이 의자에 앉아 삭발했던 자리가 모두 청소돼 있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기아차 노조 시위가 끝난 뒤 최종태 지부장이 의자에 앉아 삭발했던 자리가 모두 청소돼 있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이날 기자회견의 마지막 발언을 끝낸 최 지부장과 몇 마디 주고받고 난 뒤 돌아보니, 땅바닥에 떨어져있던 최 지부장 머리카락은 이미 치워져 남아있지 않았다. 기아차지부 현수막도 모두 철거돼 있었다.

현대차그룹 본사 앞은 기자회견이 시작한 지 30분 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사측 보안직원과 지나가는 시민들로 채워졌다. 반면 이번 기자회견이 진행된 후 기아차 노사와 소비자 등 모든 시장 주체들의 마음속엔 생채기가 생기거나 더욱 악화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 다양한 이슈로 격변기를 보내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