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색화가 박서보<통인화랑>

-전문-

통인화랑은 지난 1974년 개관, 어언 반세기동안 한국현대미술의 주요한 장(場)으로써 70년대 한국산업화와 궤를 같이하며 작가와 작품을 발굴, 오늘날에도 묵묵하게 이어오고 있다. 이 기획은 통인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졌던 주요작가의 작품과 자료를 재정리하고 다시 선별한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을 만나 볼 수도 있고 또 작가의 동료 선배들이 쓴 작품론은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작가에게서 전시는 축제이자 동시에 기록의 산실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기획이 한국현대미술사의 의미 있는 자료가 되고 후학들에게 좋은 기록가치에 일조하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

▲ 국립현대미술관 도서자료실에 소장된 ‘통인화랑-박서보 개인전’포스터<통인화랑제공>

캔버스를 북처럼 팽팽히 맨 다음 연한 그레이(혹은 크림)계통의 중간색으로 말끔히 바닥을 다지는가 하면, 그것이 마치 마르기도 전에 연필로 호흡에나 맞춘 듯이 일정한 방향과 간격을 두고 필세의 강약의 반복으로 전 화면을 일일이 긁어 놓고, 그리고는 또 그 위에 열심히 그레이로 덮어버리더니 다시 연필로 긁어내고, 또 덮어씌우고 긁어내고, 덮고 긁고….

이런 어치구니 없는 짓을 즐겨 되풀이 해가고 있는 이가 박서보(朴栖甫)씨이다. 붓이나 연필의 움직임은 캔버스의 탄력성과 손끝에 집중된 감각으로 하여 한층 더 흥분되기 마련이려니와, 이 발랐다 긁었다 하는 되풀이의 행위가 리드미컬한 메카니즘의 궤도에 올랐을 때, 은연중에 손은 멈추게 되고 작품은 그때부터 정지된 상태에서 영원히 반복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자동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근본적으로는 어느 작품이고 밑도 끝도 없고 완성도 미완성도 없이 어떤 것은 연필의 강한 필세에서, 또 어떤 것은 그레이로 뒤덮인 상태에서 멈추어 있으면서도 마냥 끝없는 반복의 표정을 짓고 있기 마련이다.

▲ ÉCRITURE(描法)N0.29-75, 192×192㎝ Pencil and Oil on Canvas, 1975

반투명 희뿌연 그레이의 톤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모든 것이 있고 없음을 다 하는 여백과 같은 바탕이라는 관념의 산물로서, 색의 개념에서 선택된 「희다」 는 모노톤보다 더욱 본질적인 흰색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탕으로서의 구조성을 띄게 될 때 그 승화도 만큼의 세계를 상기시킬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애초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이 끝없는 자기수련의 세계이고 보면, 또 더 높은 차원을 바라는 연마(練磨)의 연속에서는 그렇게 곱게 발라낸 바탕일지인정 다시금 검정 연필로 자기를 쓰리도록 매질하듯 골고루 긁어서 헐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정한 이치이다.

△글=1974년 東京에서 이우환(李禹煥)

△전시=1976년 10월5~11일, 박서보(朴栖甫,PARK SEO BO)-ÉCRITURE(描法,묘법) 통인화랑(TONG-IN GALLERY)개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