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통해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라고 말했다. 이어,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금부터 내가 전할 한 노인의 이야기가 고통에 대한 공부가 될 수 있을까?

노인은 영등포 쪽방촌에 살았다. 손글씨로 쓴 광고판을 팔아 근근이 삶을 이어오던 그는 어느 날인가 모아둔 돈을 들고 시장에 나섰다. 오랜만에 고기라도 먹어볼까 고민하던 그의 눈에 띈 것은 박스에 담겨 판매 중인 강아지 한 마리였다. 그는 고기 대신 강아지를 사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친김에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새 한 마리와 금붕어 두 마리도 함께 샀다. (그가 느낀 난데없는 충동은 측은함 혹은 동병상련의 감정이었을까?)

이후 그는 이 작은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삶을 이어나갔다. 무료급식소에서 몰래 싸온 고기반찬을 먹이기도 하고, 개를 잡아먹으려는 험악한 노숙자들과 힘겨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자식을 먹이는 기쁨과 보호자의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가 오랜만에 일거리를 얻은 날이었다. 이 일을 마치면 그 돈으로 강아지 간식을 사겠노라 다짐했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사다리 위에서 일을 하던 그는 현기증을 느끼고 그대로 추락했고, 얼마 후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부러진 다리가 붙지 않아 오도 가도 못한 채 3개월을 병원에서 보냈다. 퇴원하는 날, 그는 목발 짚은 발을 바삐 놀려 집으로 향했다. 열쇠로 문을 여는 그 순간, 그는 분명 기적을 기대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주인의 발소리를 들은 강아지가 문을 긁어대는 소리, 새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 물고기의 유유한 몸짓 같은 것들. 그러나 문을 열고 그가 만난 것은 문간에 기댄 채 굶어 죽은 딱딱한 강아지의 사체였다. 새는 죽어 떨어져 있었고, 물고기는 죽어 떠올라있었다.

‘왜 신은 그에게 그 작은 생명조차도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라는 원망이 들었다. 겨우 강아지인데. 큰 사치를 누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겨우 강아지 한 마리인데 그는 그것조차 가질 수 없었다.’ <어쩌면 당신은 관심 없는 이야기, 독거노인> 중

나는 이 사연을 2015년 출간된 책 <어쩌면 당신은 관심 없는 이야기, 독거노인>을 통해 접했다. 작가와의 인터뷰 당시 그는 76세의 노인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그를 떠올린다. 3개월 만에 집에 돌아온 그가 현관문을 열며 품었을 절박함과 기대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들이 곧장 비탄과 고독으로 바뀌는 순간도 가늠해본다. 그러면 단숨에 슬픔에 압도당해버린다. 왜 그에게는 작은 것도 허락되지 않았을까. 왜 죽음도 삶도 이렇게 슬플까. 왜 사람도 짐승도 이렇게나 처절하고 가여울까. 답도 없는 질문에(혹은 원망에) 점점 빠져든다.

어제 쏟은 눈물과 콧물이 말라붙어 허옇게 변한 소매를 내려다보며 이 글을 쓴다. 금세 또 눈물이 나는 걸 참아보려다 연신 재채기를 하고 마는 나, 그 와중에도 더 멋진 말을 골라보려는 내 모습이 조금 치욕스럽게 느껴진다. ‘고통에 대한 공부’ 이후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슬픔’의 외연을 넓히고 넓히다 보면 언젠가는 그것들을 다 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기꺼이 슬퍼질 텐데. 하지만 대개가 그렇듯,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