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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운의 문화예술] 한국 근현대미술 재정립의 중요성: 이승조국립현대미술관 대규모 회고전을 맞이하여 1960~80년대 한국 화단 중심으로

필자는 10년 동안 미술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 간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아왔지만, 그중 가장 으뜸은 “어떤 작가(Artist)를 가장 좋아하세요?”이다. 사실 존경하는 작가는 많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승조”라고 답해왔던 것 같다.

이승조는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조형적 특성의 ‘핵(核, Nucleus)’ 연작을 일관되게 제시하며, 동시대 추상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다.

이승조가 활동했던 1960~80년대의 한국 화단은 동·서양 신구(新舊) 미술문화가 교차하며 한국 현대미술이 형성되어가던 시기였다. 1960년대는 한국전쟁의 상처와 흔적을 극복하고 사회가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미술계도 활력을 되찾았다. 본격적으로 중견 및 원로화가들은 전시회를 개최했고, 미술대학 출신 젊은 작가들도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작가들은 ‘파리 청년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도쿄 비엔날레’ 등에 참가하면서 국제 미술의 동향에 대해 관심이 커졌고,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 당시 동시대 해외 미술은 누보 레알리즘(Nouveau R?alisme), 옵아트(Optical Art), 키네틱 아트(Kinetic Art), 네오다다이즘(Neodadaism), 아상블라주(Assemblage), 퍼포먼스(Performance), 색면추상(Color-Field Abstract), 팝아트(Pop Art), 환경미술(Environment Art), 해프닝(Happening), 하드 에지(Hard Edge), 미니멀리즘(Minimalism) 등이 있었다. 이러한 서구 문화의 유입과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 등 새로운 문화적 지형이 형성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미술계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전위미술(前衛美術)의 도래,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기’를 알렸다.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 이하 국전)’의 서양화 부문 작품 출품 경향으로 비구상(非具象) 및 추상 표현이 대거 등장하면서 추상미술에 박차를 가하는가 하면, ‘국전’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기존의 앵포르멜과 다른 새로운 미술의 정립을 위하여 1967~68년 ‘현대작가 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이하 연립전)’(중앙일보 주최),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한국일보사 주최), ‘A,G전’, 1972년 ‘앙데팡당전’, 70년대 후반 ‘에콜 드 서울’ 등과 같은 전시들이 개최되었다. 이러한 전시에 힘입어 추상미술은 실험미술과 함께 화단의 주도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추상에서 보이던 조형적 요소마저 제거하자는 ‘탈(脫)이미지’, ‘탈(脫)표현적’ 추상미술이 부상했다. 기존 미술가들은 작품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재료를 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원재료의 본질을 드러내는 ‘물성 강조적 표현’이 부각되었다. 이 밖에도 1980년대 군사정권의 지배하에 있었던 한국의 특수한 정치·사회적 환경에 의해 사회비판적인 리얼리즘 미학의 ‘민중미술(民衆美術, Minjung Art)’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Nucleus, 196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73x130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순화시켜 나간 한국 모더니즘 기하학적 회화 선구자 : 이승조(李承祚, Lee Seungjio, 1941-1990)

이승조는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오산중·고등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965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4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동대문상고 교사, 1970년부터 1978년까지 성신여고 교사로 재직했으며, 1981년부터 중앙대학교 전임강사로 출강, 1983년부터 조교수로 부임했다.

이승조가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새로운 전위미술의 모색을 위해 ‘오리진(Origin)’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을 때부터이다. 오리진의 뜻은 ‘근원, 기원’의 단어 ‘Origin’과, 영문 ‘O’에 한자 ‘원(元)’의 기호적 의미를 내포한다. ‘모든 질서는 근원적인 데 있고 이에 환원한다.’라는 명제를 기준으로 그간 한국 미술계에 제시되지 않았던 조형 욕구를 선보이며 그들만의 고유한 조형 언어로 발전시켜 나갔다. 멤버로는 신기옥, 김수익, 최명영, 서승원, 이상락, 이창배 등으로 이루어진 홍대 서양화 출신들이었다. 당시 젊은 작가들에게 앵포르멜은 수용해야 하면서도 넘어야 할 기성 미술이었다. 이에 오리진은 ‘반(反)앵포르멜’ ‘반(反)표현주의’를 내세우며, 명확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추상을 외쳤다. 이러한 활동은 당대 미술계에서 기하학적 추상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PM-76 Nucleus PM-76, 196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62x162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이승조의 개별적 성향이라고 할까, 보다 분명한 자신의 방법을 내보인 것은 67년 ‘청년작가연립전’ 때가 아닌가 본다."

- 오광수(미술평론가)

이승조는 1967년에 개최된 ‘연립전’을 통해 새로운 미감의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제시하며 자신의 예술세계 출발을 선언했다. 이승조의 회화에서 전체라고도 할 수 있는 ‘핵’ 연작을 이때 처음으로 내놓았다. ‘연립전’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의 59학번 ‘무동인’(1963년 졸업)과 60학번 ‘오리진’(1964년 졸업), 61학번 ‘신전동인’(1965년 졸업)의 선후배 동창 그룹의 연합 전시였다. 전위미술에 대한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을 재설정하고자 기획되었다. 참여 작가들은 전시를 통해 자신만의 모색과 실험의 창작물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F90-111A Nucleus F90-111A, 1969,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0x130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핵은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새롭게 우주의 공간 의식에 눈뜨고부터 시작한 이 작업이 작가인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 같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 이승조

물리학의 발전과 핵무기를 상징하는 ‘핵’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자 본질을 뜻한다. 동시에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의 중심,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의 원천 또는 공포성으로 지칭된다. 1960년대에는 사회적으로, 원자핵을 발견한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1963)을 수상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이승조의 핵은 산업화, 도시화적인 시대 상황과 예술의 중심, 예술의 폭발적인 힘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Nucleus, 1970,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95x161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이승조는 1968년 ‘동아국제미전’(부산 동아대학교 주최)에서 대상을 시작으로, 1968년, 1970년 연거푸 ‘국전’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고, 1969년, 1971년 특선을 차지해 추천작가가 되었다. 당시 27~30세의 나이에 ‘국전’ 수상 경력을 보이며,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음은 물론 젊은 화가의 범상치 않은 역량을 강력히 입증했다. ‘국전’ 역사상 이례적으로 추상미술이 최고의 상을 받는 것은 이승조가 처음이었다. 이승조의 문공부장관상 수상은 그 이후 1969년 서양화가 박길웅의 대통령상 수상에 기초를 닦는 등 ‘국전’ 추상미술의 신호탄을 알렸다고 할 수 있다.

이승조는 1969년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이하 AG)」의 창립 멤버로 참여, 《A.G》 전시를 비롯한 왕성한 활동으로 전위미술의 의지를 이어나갔다. 「AG」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4권의 협회지 『AG』와 1970년부터 1975년까지 4회 전시를 개최했다. 그 당시 「ST(Space and Time)」와 더불어 국내에 개념미술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창구 역할을 하여 1970년대 단색조 회화의 개념적 예술 태도의 바탕을 마련했다. 「AG」는 ‘전위예술을 기반으로 한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라는 목표로 활동해 나갔고, 이승조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F-77 Nucleus F-77, 1971,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45x145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예술적인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순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니시다 기타로(철학자)

이승조는 서구와 일본의 미술문화 속에서 한국적 정체성의 미학을 찾고자 했다. 특히 이우환의 ‘모노하(物派)’ 이론과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을 토대로 작품 표현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이승조의 ‘핵’, 파이프 형태는 그대로 지키되 미의식 탐구와 창작실험으로 다양한 구성적 변주를 시도했다. 당시 모노하는 시공간의 물질과 구조를 다루었는데, 의식과 행위를 언급하면서 신체의 반복 행위에 따른 무아(無我)의 상태로 귀결되는 물체성, 관념의 허상(虛像) 등을 말했다. 이에 이승조는 ‘핵’을 통해 작가의 신체이자 다차원의 세계를 만날 수 있게 이어주는 매개항으로서의 개념을 화폭에 이입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크기로 토막 내어 겹쳐 쌓거나 질서 있게 나열하고, 화면 중앙과 주변에 배열들이 어긋나듯이 이어지는 탄탄한 구성적 밀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로 인한 착시적 공간감은 서로 다른 세계가 병치되어 시간과 공간, 빛이 열리는 구조를 입체적으로 시각화했다. 그동안 기하학적 추상과 옵아트적 조형실험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나아가 ‘비가시적(非可視的) 세계’로 무한한 수용이 가능하며, 이것을 개념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는 초기부터 이루어온 조형적 성과물에 새로운 미학적 정립을 시도하여 추상미학과 일체화하려는 재정립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Nucleus, 1974,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45x145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다른 느낌의 원통형 파이프가 등장한다. 이승조는 파이프를 완전히 평면으로 펼쳐 투명한 공간감을 극대화하고 새로운 차원의 회화적 구조를 제시했다. 이전의 분명했던 금속성의 질감보다는 원통과 원통이 잇대어지면서 일정한 띠의 반복에 의한 균질성을 제시했다. 서로 다른 공간을 상징하는 ‘음(陰)’과 ‘양(陽)’의 원통형이 순차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이는 서로 대치적 관계, 다중적 개념으로 존재하는 ‘현상학’, 그러니까 이우환의 ‘만남(解逅)의 현상학 서설: 새로운 예술론의 준비를 위하여’에 수록된 현상학의 원리를 접목하고, 그 개념과 공간의 일체화를 이승조만의 화풍으로 소화한 것이다. 만물을 창출하는 두 개의 기(氣)를 구조적 시각화로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존과 일체, 조화의 의미로까지 나아가 새로운 관계망의 형태를 보여줬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77-12 Nucleus 77-12, 1977,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62x130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1970년대 전반을 치열한 해체 작업과 실험의 시기로 본다면, 후반은 단색화적 흐름이 대두되었던 시대였다. 그 속에서도 이승조는 자신의 고유한 조형 패턴인 파이프로 ‘핵’ 연작을 이어나갔다. 이 시대의 단색화 회화는 반복을 통해 그리는 것 자체를 무화(無化) 시켜 감으로써 평면을 부각했던 반면에, 이승조는 동시대 경향을 받아들이되 일정한 내재율(內在律)로서의 평면성을 획득하며 스스로의 차별성을 명확히 보였다. 이전의 투명한 공간감과 정신적 사유세계의 단색조 미학이 조형적으로 맞물려 중의적 파이프 표현으로 나타났다. 동양적 정서에 부합하는 은은한 무채색, 그레이 블루, 흑색 등의 심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화풍은 색채와 원통형을 모두 ‘흑색으로의 환원’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개념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단색조의 무(無)의 미학에 대한 이승조 나름의 독자적인 조형적, 회화적 실험의 결과이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83-8 Nucleus 83-8, 1983,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65.1x53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지금까지의 예술과정을 통해 이승조는 캔버스를 넘어 유한한 회화적 공간에서 무한한 개념적 공간으로의 확장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승조의 파이프는 실상이면서 허상이고, 가시적 존재이면서 비가시적 존재의 개념이다. 평면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양가적 존재와 상대적 가치에 대한 세계관을 반영한 새로운 예술의 지향점과 미학을 정립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화가는 신체를 통해 의식과 행위를 오가는 중간자이며, 현상학적 공간 구조를 회화 작품으로 펼쳐 보여, 매개항으로서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87-13 Nucleus 87-13, 1987,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30x162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1980년대부터 서서히 이승조는 지금까지의 모든 조형적 성과들을 양식적으로 혼합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기하학적 추상회화에서부터 개념, 균질, 평면으로서의 추상회화까지, 이승조의 회화세계가 축적된 ‘파이프’ 형태의 변주들을 한 화면에 총체적으로 등장시켰다. 이승조는 ‘핵’의 개념화 정착과 미학적 승화를 증명이라도 하듯, 자유로운 표현과 형상의 종합 세계를 펼쳤다. 작품은 더욱 구성적이고, 구조적인 논리성이 돋보이며 메커니즘적 요소가 폭발한다. 이로써 이승조는 다차원적 세계의 공존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Nucleus, 1989, 패널에 유채 Oil on panel, 118x220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1980년대 말에는 ‘파이프’를 회화적 공간에서 아예 분리하고자, 캔버스에서 벗어나 나무, 알루미늄, 유리, 금속, 거울 등의 다양한 재료로 대체하여 개념적 확장의 또 다른 실험을 전개해 나갔다. 캔버스로 국한되어 왔던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고 다양한 물성 실험을 하며 회화의 근본 구조를 바꾸고자 했다.

페로탕 파리 《ORIGIN》 전시 전경, 2016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Galerie Perrotin Paris (사진=유족 제공)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기하학적 추상회화는 서구의 기하학적 추상미술과 우리만의 고유 미감이 절충되면서 한국적 특수성을 갖는 독자적인 미의식을 이뤄내며, ‘서정적 기하학 추상미술’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나갔다. 기계적이고 차가움이 강하게 느껴지는 서구와는 달리 한국스러운 서정과 온기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승조의 핵(核, Nucleus)은 서정적 기하학 추상회화로, 조형적 논리 구축과 개념 미술로까지 확장된 미학으로 한국 현대미술에서 추상의 다변화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폭넓은 도약에 발판이 되었고,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새로운 전형과 개념화로 한국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미술사적으로 큰 의의와 위상을 지닌다. 이승조는 기성 미술에 반(反)하는 독자적인 회화세계의 구축을 위해 그 당시 미술계 흐름이었던 기하학적 추상, 옵아트, 개념미술, 이우환의 모노하, 현상학, 단색조 원리 등을 자신만의 회화 형식인 ‘핵’에 접목시키며 수용 및 정립해나갔다. 그 당시의 작가들은 오브제와 자연물을 이용한 설치 작업이라던가 퍼포먼스, 사진 작업을 고수했던 경향에 비하면 크게 변별되는 것이었다. 항상 깨어있었던 이승조의 예술적 태도는 추상회화와 개념미술의 결합을 이루어냈고,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 평생 작가로서 한 방향만을 추진해온 이승조, 그는 습작(習作) 하나 남기지 않았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비교적 전통이 약한 추상미술 역사에 이승조가 보여주었던 끈질긴 논리화 작업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대단히 귀중한 존재로 남아있다. 그림만이 갖는 평면성을 적극 이용하면서 동시에 평면의 한계를 거부하고 색띠와 색면을 서로 호응시켜 화면 전체로 확산하여 무한히 연속적인 우주를 보여준 이승조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서 길이 남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남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지속적으로 연구가 되어야 할 이승조의 소중한 작품을 찾고 있다. 아래 작품 이미지를 참고해 주시길 바라며, 독자 여러분들의 소중한 제보 및 연락을 기다리겠다.

■ 최고운 학고재 큐레이터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F-475-G777 Nucleus F-475-G777, 1970,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225x168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이승조 Lee Seungjio, 핵(核) Nucleus, 1971,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226x149cm
© Image Copyright Lee Seungjio Estate (사진=유족 제공)

<참고 문헌>
1. 최정주, 「이승조의 ‘핵(核)’ 연작 : 기하학적 추상의 다면성」,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최고운 학고재 큐레이터  |  chlrhdns11@naver.com  |  승인 2020.05.29  07: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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