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 遇風, 其相救也如左右手”(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싫어하지만 한배에 타서 강을 건너는데 풍우를 만나게 되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돕는다) -<손자(孫子)> 中 -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치열하게 싸운 앙숙이었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관계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오랜 원한이 있는 사이라도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보여주는 굵직한 행보에서는 경쟁의 관계를 넘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오월동주’의 움직임들이 두드러지고 있다. 

묵은 악연은 뒤로, 삼성과 현대가 만나다 

지난 13일 현대자동차그룹(이하 현대자동차) 정의선 부회장은 삼성의 에너지솔루션 계열사 삼성SDI의 천안사업장을 방문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과 만났다. 이번 회동은 이 부회장이 초청의 메시지를 보낸 것에 대한 정 부회장이 화답함으로 성사됐다. 두 리더는 회동에서 차세대 전기자동차 배터리 기술을 연구하고 있는 삼성SDI와 친환경 자동차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간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실제로 두 기업이 협력해 어떤 성과를 내게 될 것인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재계는 두 리더가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한동안 떠들썩했다.    

대기업 총수들 간의 만남은 종종 이뤄지는 일이기에 그 자체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간의 역사에서 국내 재계 1,2위 자리를 두고 그야말로 피 터지게 경쟁해 온 ‘삼성’과 ‘현대’의 관계를 감안하면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의 만남에는 남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과거 삼성의 창업주인 故이병철 회장과 현대그룹 창업주 故정주영 회장은 서로의 사업 방향성을 극도로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두 기업의 경쟁 관계는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등 창업주의 후대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삼성과 현대 계열 소속 스포츠단의 경쟁으로도 이어졌다. 프로축구 울산 현대와 수원 삼성,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스와 현대 유니콘스, 프로배구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와 삼성화재 배구단의 경기는 재계 라이벌 더비 매치(Derby match·라이벌 팀 간의 스포츠 경기)로 여겨졌다.

함께함으로 이뤄낼 수 있는 '많은 것들' 

국내 전자업계의 맞수인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이와 유사한 행보를 보여준 전례가 있다. 지난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일으킨 화이트리스트 배제,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등 외교 분쟁으로 삼성전자는 주력 제품인 스마트폰과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이에 삼성전자는 소재부품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LG계열 연료·배터리 개발 기업 LG화학의 배터리를 자사의 플래그십 제품인 갤럭시노트10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자사 계열 배터리 업체인 삼성SDI에서 생산되는 배터리의 물량으로는 갤럭시 시리즈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S20의 배터리 셀 공급 업체로 삼성SDI와 LG화학을 동시에 선정하는 등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관계를 고려하면 일련의 협력은 굉장히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재계에서 각자가 보유한 브랜드의 입지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더불어 서로의 이익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최고의 결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SK에니저-GS칼텍스 주유소 공유 인프라 기반 택배 서비스 '홈픽'. 출처= SK이노베이션

정유(精油)·에너지 업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국내 정유 업계는 4대 기업(SK에너지·현대오일뱅크·S-OIL·GS칼텍스)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굳건하게 형성돼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2018년 SK에너지와 GS칼텍스는 새로운 사업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두 기업은 각자가 전국 단위로 보유하고 있는 오프라인 주유소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C2C(고객 대 고객) 택배 서비스 '홈픽'을 시작했다. 홈픽은 전국 단위에 입지를 두고 있는 주유소를 일반 고객이나 스타트업 택배업체들이 활용할 수 있는 배송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다. 이는 대기업-스타트업의 상생과 더불어 주유소의 새로운 활용 방안 제시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SK에너지와 GS칼텍스의 의기투합이었다.

이처럼 대기업들이 공동의 이익 실현을 위해 경쟁사와 손을 잡는 오월동주 행보는 급격한 시대의 변화가 감지되거나 혹은 함께 큰 위기를 마주했을 때 종종 나타나고 있다. 서로를 밟고 일어서는 ‘데스매치(Death Match)’식 경영보다는 같이 힘을 합쳐 더 많은 경제 주체들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협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거의 모든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때에, 국내 대기업들의 ‘불편함’을 넘어선 협력의 결단은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