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원래 영어 제목 <Lost in Translation>를 창의적으로(?) 번역하여 개봉하였다(참고. 1). 사진작가인 남편과 함께 일본에 온 여자 주인공(스칼렛 요한슨)은 신혼임에도 외로움과 불확실한 앞날 때문에 불안을 느끼던 중 우연히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다른 남자(빌 머레이)와 공감하면서 친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얻지 못하는 여자 주인공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잘 표현한 제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이 통역은 안되지만 계산은 될 수 있다’. 사랑하게 할 수는 없을 지라도 왜 사랑하게 할 수 없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은 우연을 가장한 방법으로 사랑의 계기를 만들 수 있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왜 그런지 이해하고 싶어 한다. 사랑은 그런 일중에서도 가장 미묘한 일이지만 전후 사정을 들어보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지 짐작할 수 도 있다. 많은 심리 상담 전문가나 흔히 선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짐작을 하거나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에는 주변 사람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있는 사건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사건을 이루는 구성요소들과 구성 요소들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이러한 파악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지고 정교화된다. 사람들은 ‘이것’으로부터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한다.

이것을 ‘세상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것이든 자연 현상에 대한 것이든 사회 현상에 대한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 모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이 동료 검토(peer review)로 해당 분야의 ‘세상 모델’에 대하여 논의하는 곳이 ‘학계’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세상 모델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물들이 어떤 형태로던 이러한 세상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고등동물일수록 더욱 정교한 세상 모델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인공지능이나 인지과학에서는 이러한 ‘세상 모델’을 ‘계산적 모델(computational model)’로 만들고자 한다. 이 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필자에게 계산적 모델은 ‘실행 가능한 수학 모델(executable mathematical model)이다. ‘계산적’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타산적’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고 컴퓨터 기계를 떠올리는 유물론적 연상으로 인하여 이래저래 좋은 느낌을 주진 못한다. ‘사랑도 계산이 된다’는 말 자체는 ‘이해 타산적’ 사랑이라는 의미로는 사용될 수 있지만 사랑에 대한 ‘계산적 모델’에 대한 거부감은 두말 할 나위없을 것이다. ‘computational thinking’이라는 교육계의 화두도 ‘컴퓨테이셔널 사고’ 또는 ‘컴퓨팅 사고’로 번역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 있는 것 같다(참고 2).

번역어야 어찌 되었든 ‘계산적 모델’은 맞고 틀림에 무관하게 가장 명료하게 표현되는 ‘세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계산적 모델은 대상이 사랑이 되었든 자연이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대상을 잘 이해하고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이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수학들이 동원되는 이유는 대상을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자연과학이 명료한 수학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적인 반복 실험들과 대조가 가능한 것이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딥러닝 기계 학습도 인간 지능의 핵심적 기관인 두뇌가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아이디어인 인공신경망 모델에서 출발하여 충분히 인간 지능에 대한 가장 좋은 ‘계산적 모델’인지와는 무관하게 수학으로 명료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하여 많은 경제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이러저러한 경제 전망을 내고 있지만 아주 정교하지는 않다. 실증할 수 있는 정교한 모델은 논문이나 비중있는 보고서 형태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에서도 이러한 모델들이 명료하게 표현된 복잡한 수학적 모델들로 만들어지지만 잘 맞지는 않기 때문에 잘 예측하고 잘 대처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미처 고려하지 못한 또는 미처 대처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이나 인지과학은 의식, 감정, 이성, 등과 같은 인간의 인지작용을 모델링한 ‘인지 아키텍처(cognitive architecture)’라는 계산적 모델을 연구하고 있고 인문사회학에서도 계산 인문학, 계산 사회학, 계산 역사학과 같은 이름으로 계산적 모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디지털’이나 ‘(빅)데이터’라는 수식어가 붙은 인문학, 사회학, 역사학, 등이 있고 계산적 모델은 디지털화 되어야 하고 (빅)데이터가 전제된다는 의미에서 ‘계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인문학, 사회학, 역사학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계산적 모델’을 통하여 연구가 진행되는 점에서 다소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한때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선정성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오해 때문에 인공지능을 계산적 지능(computational intelligence)라고 부르자는 논의도 있었다. 사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자연지능을 면밀히 연구하여 구현한다기보다는 기계가 지능적이라고 불리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한 공학적 기술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알파고의 딥러닝 기계학습이 신경계 모델로부터 왔고 당대 최고 바둑고수인 이세돌을 이기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었지만 자신의 결정에 대한 어떤 설명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 지능은 아닌 것이다. 인공지능의 방법이 인간의 방법과 같은 필요는 전혀 없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결정에 대한 설명이라면 인간의 방법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딥러닝 기계학습의 설명은 단순히 설명을 할 수 있느냐 없는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만 인간에게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다는 것은 개념, 이성, 의식이나 감정, 등과도 연결된 문제인 것이다.

철학이나 문학, 역사학, 그리고 사회학 등을 비롯한 많은 인문사회학들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생각들, 즉, 다양한 모델들을 내놓았다. 근대 과학이 등장하면서 심리학, 생물학, 뇌과학, 등도 다양한 모델을 내놓고 있다. 이제 인간에 대한 측정은 미시적으로는 뇌 신경세포수준에서도 측정이 가능하고 거시적으로도 많은 소셜 미디어(트위트, 페이스북, 각종 블로그, 뉴스, 등)들을 통하여 사회적 변화의 측정을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많은 모델들은 이제 계산적 모델들로 만들어질 수 있고 인공지능으로 구현될 수 도 있다. 우리가 만드는 세상에 대한 계산적 모델이 ‘세상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인간이 이제까지 이해한 ‘최선의 세상’일 것이다. 이러한 계산적 모델은 분과적인 세상 이해에서 통합적인 세상 이해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도 계산될 수 있다’는 생리적,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들을 고려한 ‘계산적 모델’을 통하여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고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한 가치 중의 하나인 사랑이 폄하되는 것이 아니다. ‘계산적 모델’을 통하여 잃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이고 얻는 것은 더 나은 이해이다.

참고 1. https://ko.wikipedia.org/wiki/사랑도_통역이_되나요?

참고 2. https://ko.wikipedia.org/wiki/컴퓨팅_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