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항공 항공기(왼쪽), 아시아나항공 항공기(오른쪽).출처=각사

[이코노믹리뷰=이가영 기자] 국내 항공업계는 최근 수십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왔다. 1969년 최초의 민간 항공사 출범에 이어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풀서비스항공사(FSC) 체제가 확립됐다. 이후 소득 증가와 해외여행 수요 확대 등이 맞물리며 저비용항공사(LCC) 전성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가파른 성장 뒤에는 부작용도 존재했다. 

대한항공, KAL 인수로 ‘첫발’… 1988년 양대 국적사 체제 확립

대한항공의 전신은 1962년 설립된 교통부 산하 대한항공공사(KAL)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던 대한항공공사를 1969년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인수하면서 그해 3월 1일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항공사가 출범했다. 

단 8대의 항공기로 시작한 대한항공은 1969년 10월 2일 출범 이후 첫 국제선 노선으로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 노선을 개설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노선을 발판으로 꾸준히 국제선을 늘려 나간 대한항공은 창립 2년 후인 1971년 4월 한국 최초의 태평양 횡단 노선인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LA) 화물 노선에 첫 비행기를 띄웠다. 이듬해인 1972년 4월 19일에는 대한민국 민항기 역사상 최초로 서울과 LA를 오가는 여객 노선도 취항했다. 

1970년대 발생한 1·2차 오일쇼크로 글로벌 항공사들이 감원·감축을 단행했지만, 대한항공은 되레 공격적인 확장을 통한 ‘정면 돌파’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1973년 서울-파리 화물 노선, 1975년 서울~파리 여객 노선, 1979년 서울-뉴욕 화물·여객 노선도 취항하는 쾌거를 거뒀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항공은 1980년대 글로벌 항공사로서의 토대를 다져나갔다. 자국 산업 보호를 내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형 항공기(B747)를 확보한 대한항공은 공격적인 취항에 나설 수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개최한 최초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로, 지금의 양대 항공사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서울올림픽의 활성화와 원활한 개최를 위해 제2의 항공사를 필요로 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이 항공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1국가 1항공’ 체제를 포기하고 다수의 항공 사업자에게 면허를 발급한데다, 냉전 화해 무드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글로벌 관광 수요가 확대된 점도 영향을 끼쳤다. 

대한항공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항공료 인상 등 민감 이슈와 관련해 독점을 견제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면서 제2 민항사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정부는 제2의 민간 정기 항공운송 사업자로 제계 20위권이던 금호그룹을 선정했다. 1988년 2월 ‘서울항공’으로 출범한 아시아나항공은 같은 해 8월 현재 사명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해 12월 첫 항공기 B737-400을 도입해 서울-부산, 서울-광주 등 국내선에 첫 비행을 시작했다. 

1989년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시행과 함께 양대 항공사의 차별화된 경쟁으로 1990년대 한국 항공업계는 황금기를 맞았다. 

특히, 복수 민항기 경쟁 체제를 확립하려는 정부의 정책에 발맞춰 아시아나항공은 시세 확장에 본격 나섰다. 1990년 서울~도쿄 노선을 취항하며 국제선을 취항했고, 1991년 서울~LA 장거리 노선도 취항했다. 1995년에는 전 세계 항공사 최초로 기내 전면 금연을 실시하는 등 차별화된 서비스도 내세웠다.

순항하던 항공업계는 1990년대 후반 세계 항공업계의 공급 증가에 따른 경쟁 심화로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내 사정도 녹록치 않았다.

항공업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대한항공은 2000년 고(故) 조양호 회장의 주도로 아에로멕시코·에어프랑스·델타항공 등과 세계적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을 창설했다. 아시아나항공도 2003년 유나이티드항공·루프트한자 등이 속한 세계 최대 항공 동맹인 ‘스타얼라이언스’에 13번째 항공사로 합류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이들은 항공사 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코드쉐어(공동운항), 공동 마일리지 프로그램, 라운지·체크인카운터 공유와 같은 혜택으로 고객 충성도를 확립했다. 양대 항공사는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항공 시장에서 더욱 영향력을 높일 수 있었다.

▲ 국내 LCC들. 제주항공(상단 왼쪽), 티웨이항공(상단 오른쪽), 진에어(하단 왼쪽), 이스타항공(하단 오른쪽). 출처=각 사

‘LCC 춘추전국시대’ 개막… 제주항공, 10년만에 60배 성장

2000년대 저비용항공사(LCC)들이 잇따라 출범하면서 양대 항공사 체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한성항공(현 티웨이항공)이었다. 2004년 국내 첫 LCC로 출범한 한성항공은 양대 항공사의 절반 수준의 저렴한 운임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으며 기존 항공 시장의 메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비행기운임은 비싸다는 패러다임이 깨지면서 항공 시장에도 거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같은 시류에 발맞춰 2005년 제주항공, 2007년 이스타항공이 설립됐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도 각각 자회사인 진에어와 에어부산을 통해 2008년 LCC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후 아시아나는 2016년 에어서울을 통해 또 하나의 자회사 LCC를 취항했다. 

소득 증대로 해외여행 수요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LCC들은 저렴한 가격과 공격적 노선확대를 앞세워 고객 잡기에 나섰다. FSC 고객을 흡수하는 동시에, 가격 장벽을 낮춰 여행에 관심이 없던 소비자도 새로운 고객으로 유입하는 식이었다. 그 결과 메르스의 직격탄을 맞아 대형 항공사의 실적이 곤두박질친 2015년 상반기에도 LCC들은 사상 최고의 실적을 거뒀다.
 
특히, 제주항공의 고공성장은 눈부시다. 2006년 첫 취항한 제주항공은 창립 15주년 만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자리를 위협하는 LCC 1위로 발돋움했다. 제주항공의 지난해 매출은 1조3760억원으로 항공기수 45대, 취항 노선 88개를 보유하고 있다. 

제주항공의 성공 요인으로는 단일 기종 도입을 통한 원가 절감, 다양한 부가서비스로 매출 증대 등이 꼽힌다. 제주항공은 단일 기종인 B737-800NG 단일 기종을 운용함으로써 전문성은 높이고 인건비와 정비비 등 원가 부담은 줄였다. 또한 좌석 선택과 옆 좌석 추가 구매 서비스 등을 국내 최초로 들여오며 부대 수익 제고에 힘썼다. 

그 결과 2015년에는 LCC 최초로 증시에 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창립 10주년만의 쾌거였다. 빠른 속도로 국내 LCC 1위 사업자에 오른 제주항공은 매년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과의 격차를 줄여 왔다. 

눈부신 LCC의 성장을 부러워하던 후발주자들도 출사표를 던졌다. 지난해 4월 3곳의 신생 항공사가 추가로 항공운송 면허를 발급받으면서 국내 LCC는 총 9곳으로 늘어나게 됐다. 강원도 양양공항을 거점 공항으로 둔 ‘플라이강원’, 충북 청주 기반의 ‘에어로케이’, 중장거리 특화 항공사를 앞세운 ‘에어프레미아’ 등이다. 그야말로 항공업계의 춘추전국시대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항공업의 성장세는 눈에 띄게 둔화되기 시작했다. 수요둔화와 공급과잉, 이로 인한 출혈경쟁 등 리스크 요인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실제 최근 10년간 항공시장 활성화를 견인했던 LCC 이용객 증가율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국토부에 따르면 2010년 전년 대비 55.5% 폭증하며 팽창한 LCC이용객 증가율은 매해 감소하고 있으며 2017년부터는 감소세가 눈에 띄게 뚜렷해졌다. 2018년에는 12% 증가에 그쳤고, 보이콧 재팬 등의 사태를 겪은 지난해에는 한 자릿수 성장에 그쳤다. 

출혈경쟁도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LCC들은 국제선 항공권을 땡처리 가격에 팔아넘기며 봉사활동에 가까운 운영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슷한 노선, 한정된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선 ‘제살 깎아먹기 식’ 치킨게임이 불가피한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고공성장 이면의 안전문제까지 불거지며 위기감이 확대됐다. 이는 국내 항공업 격변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