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천이다. 제아무리 귀한 것도 흔해지면 그리 흥미롭지가 못하다. 귀하고 드물 적에는 그리도 보고 싶더니 흔해지면 그 귀함은 사라진다.

초여름 기온에 도심의 목련은 벌써 흐드러졌다. 40여년 만에 일반에게 공개한다는 천리포수목원은 500여종의 목련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가 걱정이 앞선다.

가닿기도 전에 목련이 그 아름다움을 다 걷었을까 걱정하며 태안으로 향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서산 IC로 빠져나와 천천히 천리포수목원으로 향한다.

2007년 12월7일, 충청남도 태안 만리포 북서쪽 10km 지점에서 유조선 허베이스피릿호와 해상 크레인이 충돌했다.

그 충돌로 원유 1만2547kl가 유출되고 태안, 서산, 보령, 서천, 홍성, 당진군 등 6개 시·군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선정
사건이 벌어진 뒤 두 번째 봄이 찾아왔다. 기름으로 뒤덮였던 태안 앞바다는 거짓말처럼 깨끗한 얼굴로 우리를 반긴다.

드넓은 만리포와 천리포 해변은 의좋은 형제처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다. 이들의 표정에는 옛 기억이 보이질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서의 해변, 모래밭에 섰을 뿐이다.

아픈 상처는 이렇듯 자연스럽게 치유되는가 보다. 상처는 치유되지만 흉터는 남는 법이다. 자연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칼 밀러, 한국 이름으로 고 민병갈 선생이 비밀의 화원을 건설하면서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숲이 아니라 나무를 위한 숲’이란 큰 원칙을 세웠던 것처럼 자연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 자신을 위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리라.

회원만 즐기던 비밀을 4월1일 공개하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천리포수목원은 회원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던 비밀의 화원이었다. 비밀의 화원이 지난 4월1일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40여년 만의 일이다. 걱정했던 것처럼 목련이 다 져버리지도 않았다. 태안해안국립공원 내에 있는 수목원은 여름에는 내륙보다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난한 기후 특성을 보인다.

그런 까닭인지 해변 쪽에 지날 때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해변 쪽에서 자라는 목련은 대부분 보기 좋을 만큼씩 살짝 봉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 충청남도 태안반도의 천리포 지역에 땅을 마련할 때만 해도 이곳은 삭막한 황무지와 다를 바 없었다.

민병갈 선생이 말없이 수십 년간 18만7000여평 위에 일궈낸 천리포수목원은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수목협회가 지정하는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푸른 눈의 한 사람이 홀로 터를 닦고 일생을 바쳐 일궈낸 천리포수목원이 ‘서해안의 푸른 보석’이라 불려도 절대 과하지 않아 보인다. 수목원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목련을 만날 수 있다.

1997년엔 이곳에서 국제목련학회 총회가 열렸다고 한다. 우리가 봄의 전령사로 여기는 백목련이나 자목련은 여기에선 대단한 것이 아니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목련이 있는가 하면 8월쯤 꽃피어 12월에 지는 사철 푸른 ‘상록성 목련’이 있기에. 잎과 함께 5, 6월에 노란 꽃을 피우는 황목련, 잎이 가느다랗고 꽃잎이 18개나 되는 별목련, 꽃보다 잎이 먼저 피는 토종 산목련(함박꽃나무)과 일본목련(후박나무)…. 한라산 토종 목련도 눈에 띈다.

꽃봉오리가 어린애 종주먹 모양으로 귀엽고 앙증맞다. 색깔도 옥양목처럼 눈부시다.
천리포수목원엔 1만5000여종의 식물들이 산다. 호랑가시나무가 600여종, 동백나무 400여종, 단풍나무 300여종, 무궁화 250여종 등 진귀한 보물들이 많다.

빨간 잎이 노란 잎으로 변했다가, 다시 초록 잎으로 바뀌는 삼색 참중나무, 민병갈 선생이 세계 최초로 발견하여 국제학회 호적에 올린 완도호랑가시나무, 요즘 노란 면류관 꽃을 닭 볏같이 단, 가지가 3개로 갈라진 삼지닥나무, 역시 요즘 한창 하얀 꽃을 피운 멸종 위기의 미선나무, 봄과 가을 두 번씩 꽃을 피우는 가을벚꽃나무, 가지가 구불구불한 용트림매실나무….


‘황목련’ 등 진귀한 꽃나무 가득
수목원 탐방은 입구 쪽에 있는 큰 연못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이면 흰뺨검둥오리가 날아와 머물다 간다는 연못 주변으로 거대한 목련나무가 자리 잡았다. 열 개도 넘는 꽃잎을 가진 ‘별목련’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양새가 눈이 부시다.

연못 주위로는 핏빛처럼 진한 자주색의 목련이 서 있는데 이것의 이름은 ‘불칸(Vulcan)’.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화신 이름을 땄다. 핑크빛 목련인 ‘아테네(Athene)’는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향기를 뿜어낸다.

이외에도 달콤한 향기를 가진 ‘스위트 하트’, ‘디바’, ‘얼리버드’ 등 각기 다른 이름의 목련이 푸짐한 꽃송이를 매달고 있다.

목련뿐만이 아니다. 연둣빛 한껏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며, 어린 메타세쿼이아, 길 따라 만나는 침엽수와 낯선 나무들이 어우러지듯 서 있다.

큰 연못을 돌아가면 수련 가득한 작은 연못이 나오고, 그 연못을 끼고 오른쪽 길로 오르면 목련원과 구근원이다. 이곳에 아찔하게 노란 수선화꽃밭이 있다.

노랗고 흰 꽃잎의 수선화는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우아한 자태를 보인다. 어쩌다 바람 한번 일면 잠시 흔들렸다가도 이내 그 우아함을 회복한다.

이 길을 내처 오르면 해안전망대다.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숲에 서서 천리포해변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리고 섬 하나가 보이는데 닭섬 혹은 낭새섬으로 천리포수목원 일부로 야생 그대로의 상록활엽수림이 조성돼 있다고 한다.

물길이 열리면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는데 아직 일반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민 선생이 닭을 지독해 싫어해서 닭섬을 사들인 이후 이름을 ‘낭새섬’으로 바꿨다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수목원 곳곳에 자리 잡은 게스트하우스도 볼거리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철거 위기에 처한 서울과 태안 지역의 한옥과 초가집을 고스란히 옮겨와 내부만 현대 시설로 바꾼 후 팬션으로 사용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한옥은 세월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이엉을 얹은 초가집도 나름 훌륭하다.

아름다운 숲과 꽃이 있는 천리포수목원은 그저 볼거리 가득한 곳만은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숲, 나무를 위한 숲으로서 천리포수목원은 자연의 일부인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마치 인간의 시원 같은 수목원을 천천히 거니는 것 자체로도 아주 놀라운 경험이 될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허락한다면 신두리 모래사구와 백화산 자락의 마애삼존불도 둘러보면 좋겠다.

글·사진 김기연 (hatssa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