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지막 주, 확진자 수 세 자리에 사망자는 두 자리로 접어들었다.

하루 종일 불안에 떨고 있다. 코로나19 뉴스 속에 파묻혀 지낸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부팅하고 제일 먼저 찾아 보게 되는 사이트는 실시간 상황판이다. 전 세계에서는 확진자나 사망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우리나라에서는 밤 사이에 또 얼마나 증가했는지에 모든 촉각이 곤두선다. 모이기만 하면 뉴스에서 나온 그 얘기들이 반복된다.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도 최신 뉴스들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식들이 계속 올라온다.

얼마 전까지는 그런 말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펜데믹’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섣부르게 사용하고 있다. 대유행이라는 말인데, 걸핏하면 ‘언제든 펜데믹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 나팔이 울리고 있다. 사람들이 밖으로 잘 다니지 않고, 누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꺼림칙하다. 제발 우리 집,사업장에는 행여라도, 확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의심환자라도 생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하다. 특별한 지병이 없는 한 잘 치료 받으면 낫는 병이기에 치사율에 대한 걱정은 없지만, 방역을 위해 폐쇄를 해야 하기에 겁이 나는 것이다.

중동호흡기 증후군 (ME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SARS), 조류독감 (H5N1), 돼지독감 (H1N1) 같은 수 많은 유행성 질병들을 경험해 봤기에 이력이 쌓일 법도 하건만, 이번 같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에는 늘 새로운 불안이 따른다. 여기에 에볼라나 에이즈 같이 상시적으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행여라도 있을지 모를 좀비 같은 것들도 불안의 대상이다. ‘아웃 브레이크’, ’12몽키즈’, ‘월드워Z’, ‘워킹데드’, ‘부산행’ 같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사람이 아니어도 대충 끔찍한 그 뭔가가 언제든 나를 덮칠 수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불안에 싸여 있는 것도 맞다.

 

매년 수백만 명의 사망자에도 불안하지 않는데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언론 같은 미디어들이 합작하여 빚어낸 결과다. 그들은 할 일을 했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제대로 알려야 함은 당연하다.거기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끌기 위해 과도한 설정과 자극적인 문구들이 첨가됐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사실 메르스니사스 같은 질병이 무서운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로 인한 사망자는 지금까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질병이 이웃나라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화들짝 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비해 지금도 매년 홍역으로 수천 명이 그리고 말라리아로 인해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여름철 야외 캠핑을 하다가 모기에 물려서 성인의 경우에도 치사율이 20%나 되는 치명적인 말라리아에 감염이 되었다면, 주위에선 ‘조심 좀 하지!’라는 정도의 면박 정도가 되돌아 올 것이고, 언론이나 미디어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람간 전파되는 감염의 위험이나 백신이나 치료 약의 유무 등 여러 가지가 다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는 지금도 매년 전세계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치사율도 높고 사망자가 이렇게나 많지만 불안하지 않다. 불안감을 조성하지도 않는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연구된 질병이지만 아직도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안감을 조성할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다. 불안에도 내성이 생긴 탓이다.

뉴스가 매일 매일 지치지도 않고 쏟아진다. 어떤 것들은 과학적 근거도 없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 얘기인줄 뻔히 알지만, 불안감에 클릭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새로운 불안감을 또 얻는다. ‘어디어디 방역체계가 뚫렸다. 코로나에 무너졌다. 문제다’는 식의 기사가 넘쳐나고 새로이 늘어난 확진자 수, 사망자 수가 마치 월드컵 게임 스코어가 중계되듯이 실시간으로 알려진다. 그 순간에 맞춰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린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린다. ‘어느 지역 확진자 발생’ 알람이다. 그런 알람이 울릴 때마다, 실시간 상황판 사이트에서 플러스 기호를 달고 있는 붉은 글씨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불안감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서울대학교의 한 보건학 교수가 그 동안 많이 참았다는 듯 쓴 소리를 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냐. 겁 먹으라는 것이냐?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제 행동에 도움이 되는 보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교수는 또 시민들 거의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는 등 예방 수칙을 잘 지키고 있는 점을 얘기하며, “(이렇게 시민들이 잘 대처하면) 한국에서 그렇게 최악의 상황까지 안 가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보도를 본 사람도 많았겠지만,금방 묻혔다.

원래 언론의 특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미국 저널리즘 연구가의 대가로 알려진 마이클 셔드슨은‘신문의 역사 분석’에서 ‘미국의 신문사들은 부정적이고 저속한 이야기들을 전면에 내세워 인지도를 쌓았다’고 말했다. 단지 읽히는 것을 떠나 소위 먹히는 얘기는 훈훈하고 정감 있는 그런 얘기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쇼킹한 제목으로 유인하여 가정과 가설을 뒤섞어 놓으면 그 글은 널리 회자된다. 전혀 발생 가능성이 없더라도 ‘만일’을더하고, ‘만약’을 곱해서 비약시킨 내용이라도, 그 얘기는 먹힌다.

전염병이 확대일로에 놓여 모든 사람들이 전전긍긍 하는 지역에서 방역활동이 잘 되고 있는지에 대해 여론을 조사한다면 그 대답은 들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런 지역에서 여론이 좋은 것이 비정상이다. 또, 어떤 사안에 대해 아무리 많은 다수의 의견이 있더라도,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식의 보도도 많다. 찬성과 반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기사는 반대 의사를 가진 사람이 아무리 적어도 찾아서 밸런스를 맞춘다. 읽는 사람이야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게 기사의 속성이다.

 

어려운 ‘무사고’는 뉴스가 못되지만, 쉬운 ‘사고’는 뉴스다

‘아버지와 아들과 나귀’라는 얘기가 있다. 장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팔기 위해 가면서 겪는 에피소드다. 처음에 둘 다 나귀를 끌고 가자 주변 사람들이 나귀를 두고 걸어간다고 타박한다.그래서 아들이 타고 간다. 그러자 또 그걸 본 노인네들이 늙은 아비는 걷고 젊은 아들은 타고 간다고 지적한다. 다음엔 아버지만 타고 가자 아낙네들이 걸어가는 아들이 불쌍하다고 지적했고, 둘 다 타고 가자 이번엔 주위에서 둘이나 태운 나귀가 불쌍하단다.할 수 없이 둘이서 낑낑대며 나귀를 메고 가자 다시금 사람들이 손가락질 해대며 비웃었다.

사실 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본 사람들이 지적하는 내용들 중에 틀렸다거나 그건 아니라는 말을 할만한 것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지적은 나온다. 길 옆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던 노인네, 아낙네 같은 사람들이 바로 언론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벌어지는 현상이나 상황은 하나인데,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것도 지적하고 저것도 뭐라 한다. 얘기의 결말은 하도 옆에서 뭐라고들 해서 아버지와 아들은 낑낑대며 나귀를 메고 가게 됐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비웃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셋 다 물에 빠지는 것으로 끝난다. 당신이 그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는지 묻고 싶다. 사실 정답은 없다.

그래서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제퍼슨은‘기사에는 4가지 종류가 있다. 진실(Truth), 있음직한 이야기(Probability), 그럴듯한 이야기(Possibility), 그리고 거짓말(Lie)이다”라고 했다.그리고 “때로는 착오와 거짓으로 점철된 뉴스를 매일 읽는 사람보다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 진실에 가깝다”는 말을 남겼다. 또, 우스개 소리로 전해지는 것 같지만 ‘세상에는 세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그리고 통계다’는 말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때 총리를 지냈던 벤저민디즈데일리가 했던 말이다. 언론은 여전히 통계 숫자를 늘 버무려서 기사를 써댄다.거기다 완벽한 문외한이어도 연예인 같은 유명인이 한마디 한 것이라면 또 기사가 된다.

기업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늘 무사고를 기원한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커다란 글씨로 ‘000일 무사고’를 걸어두고 있다. ‘1년 무사고, 3년 무사고, 10년 무사고’라면 그렇게 오랜 동안 얼마나 사람들이 긴장하고 신경 써야 달성할 수 있는 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닥뉴스감은 못 된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무사고를 유지하다가 어느 한 순간 부주의나 불가항력적인 일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면 뉴스가 된다. 무사고의 연속을 아무리 자랑하고 싶어도 언론은 관심 가지지도 않지만, 사고가 알려지면 아무리 숨기고 싶어도 언론은 무섭게 파고든다. 평온할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불안할 때는 나타난다. 그게 언론의 속성이다.

여론의 맨 앞에 그런 언론이 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이 어렵다고들 한다. 홍보가 중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다. 강 건너에서 일어난 불을 구경할 때의 마음과 내 집이 불타고 있을 때의 마음은 당연히 다르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안에 대한 보도와 불확실한 경우에 대하는 보도도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때문에 평소에는 시장의 약장수가 떠드는 소리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기댈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렇기에 군중심리가 동반되어 여론의 향방을 결정짓는 언론의 영향력은 절대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평소에 아는 사람들만 찾는 맛집으로 단골 위주로 판매하던 음식점이 어찌어찌 언론에 소개되고 대박이 났다고 하다가 얼마 뒤에 망한 경우를 심심찮게 대할 수 있다. 양날의 검이다.잘 쓰면 좋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내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 위에 여론이 있다. 죄의 유무야 재판정에서 가려지지만 그 전에 최상위법인 여론에서 낙인이 찍혀버린다면 치명상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기업은 잘 될수록 여론의 향방과 언론을 잘 살펴야 한다.

세계 경제나 국가경제나 활황기는 언제나 올지 알 길은 없고, 우상향 경제 화살표는 힘없이 아래로 쳐져만 가는 요즘이다. 갈수록 걱정거리는 쌓여만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아버지와 아들이 장에 가는 목적은 나귀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족들이 맛있는 것도 먹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팔랑귀 때문에 탔다가 내렸다가 반복하다가 결국 나귀와 함께 진창에 빠져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옆에서 하는 얘기에 귀를 닫아도 안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불안은 불안을 부를 뿐, 적절히 참고하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