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4년 전쯤 별다른 목적도, 아는 바도 없이 훌쩍 떠나 시골마을에 있는 성당에 다녀온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이번 기차를 탈 때에는 대학 동기들과의 모임이라는 아주 명확한 목적이 있었고, 약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여서 ‘여행’이라 부르기는 유난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렇지만 얼마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좌석에 올라앉았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기차에 탑승하기 전 역 근처의 서점에서 손가는 대로 한 권의 책을 고른다. 미리 예약해둔 창가 좌석을 찾아 앉는다. 열차는 적당한 소음을 내며 달리고, 그 소리 위에 차분한 음악을 얹어 독서에 빠져든다. 정보도 없이 고른 책이 썩 마음에 든다. 가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면 1월의 햇볕이라기에는 너무도 찬란한 빛이 쏟아지고, 나는 어느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처럼 풍경에 취한다. 내릴 역을 알리는 방송이 들리고, 40분간의 짧은 기차여행이 끝난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책의 3분의 1 지점에 책갈피를 꽃아 가방에 넣고는 기차에서 내린다. 그 순간 나는 행복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렇지만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말한 것처럼, 여행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 모든 여행은 작은 기대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좋은 책, 따사로운 날씨를 누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와 더불어 내게 주어진 것은 앞 좌석 승객들이 풍기는 햄버거 냄새였다. 온 객실로 뻗어나가는 그 알만한 냄새는 나를 불쾌하게 했다. 코는 압도적인 냄새에 점령당하고, 아마도 기름에 절어 얼룩졌을 종이봉투를 뒤적이는 소리까지 귀를 파고들었다. 후각과 청각을 사로잡힌 것도 억울한데, 급기야는 ‘뇌’까지 햄버거 냄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소심한 내게는 결코 있을 리 없는 일이지만, 만약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이 맞붙게 될 것이다. 여행에 방해를 받은 나의 관점은 이러하다. '내 돈 내고 기차 타서 왜 내가 먹지도 않은 음식 냄새를 맡아야 하느냐. 불쾌하다. 다른 승객들에게도 민폐이다.' 그에 응수하는 그녀들의 관점은 이러할 것이다. '돈은 나도 냈다. 햄버거 좀 먹겠다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규정에 어긋난 일도 아닌데 웬 난리냐.' 급기야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내 여행을 망쳤다!' '무슨 소리! 내 여행의 기대를 깨버린 건 당신이다!' 이 논쟁은 '기대'와 '권리'에 관한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기차여행에서 누리고 싶은 각자의 기대와 권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다. 상충하는 권리 중 누구의 권리가 우선인가. 그녀들의 주장대로 객차 내에서 음식물을 먹는 것은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냄새가 덜 나는 음식을 먹으면야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맡겨져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논쟁에서 내 권리는 힘을 잃기 쉽다. 그렇다고 해도 여행을 편안하게 누리고 싶다는 나의 기대와 권리는? 햄버거 냄새로부터 시작된 가상의 싸움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나는 기어코 이런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나란 사람은 어째서 이런 데에서만 권리를 찾고자 하는가.

김수영 시인은 고궁을 나오며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하고 탄식했다. 나로 말하자면 이렇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도 (이렇게 사사건건) 분개하는가'. 나의 사사로운 분노는 어디 멀리가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돌아와 내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는 이렇게 끝나고, 나도 한 웅큼 작아진 채 기차에서 내린다. 처음 기대한 것과는 달리, 40분간의 짧은 기차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행복한 에너지’가 아니었다. 나는 ‘너무나 쉽게 분노해버리는 나’와 ‘그런 나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획득했다.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고 많다지만, ‘스스로를 어여뻐하는 마음’을 갖기란 그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일에 속한다. 방탄소년단의 연설을 시작으로 요 몇 년간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던 메시지인 ‘Love Yourself, Love Myself’를 이뤄내기란 얼마나 힘든가. 제아무리 그들의 콘서트에 쫓아가 응원봉을 흔들며 ‘You can’t stop me lovin’ myself’를 목놓아 외쳐보아도 잠시일 뿐. 이내 ‘스톱! 러브 마이 셀프’라며 항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애심의 박약은 비단 나만 겪는 일은 아닌지라, 시인 박상수는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나 말야 오래 입이 쓰고 내가 미워져 그런 날이 많아 ... 자꾸만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기분” (<모노드라마>, 시집 《오늘 같이있어》 수록)

소태같이 쓴 입을 다시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날들. 그날들 중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이런 날도 있을 것이다.

“믿어지니?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 (<극야>, 위와 동일한 책)

이 시의 끝에서 시인은 ‘밤과 속삭이며 비밀스러운 눈빛을 나눈’다. 창문 앞에 앉아 밤하늘을 보며 ‘오늘 하루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다시 더듬어봐도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의 끝에는 그야말로 최종의 보스인 ‘My Self’가 남아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평생에 걸친 숙제일지도 모른다.

다시 그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든 채 기차에서 내린 나는 오랜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이 가진 특유의 선함과 따듯한 에너지는 나의 내면에 다시금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안으로 말린 채 서로 엉겨 붙고 쪼그라든 내 속은 어느새 조금 부풀어 올랐다. 난제를 풀어가는 중에 찾아오는 선물 같은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