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동물 2012-17, 2012, 한지에 수묵 및 아크릴, 150×106cm/Nomadic animals 2011-17, 2012, ink and acrylic on hanji, 150×106cm

작가 허진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전유물인 서사의 부활과 자기부정의 정신을 통한 비위계적인 다양한 정체성의 수행이라는 양날의 무기를 함축하며 한국화의 현대적 계승자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동시에 그에게는 형상을 통한 사유의 매체로서 한국화의 한계에 대한 엄밀한 자기반성과 극복이 끊임없이 요구되어왔다.

더불어 그만큼의 기대 역시도 그에게는 늘 함께 따라다녔다. 아마도 작가 ‘허진’에 앞서 그에게 따라붙는 배경과 이력이 한몫 했을 것이다. - 조선말기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이자 호남 남종화의 시조인 소치 허 련의 고조손이며 근대 남화의 대가인 남농 허건의 장손, 소치의 운림산방 화맥을 5대째 이어가는 주인공.

그리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동양화를 전공하고, 전남대학교 한국화 교수라는 타이틀 –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권위와 전통, 그 어디에도 전적으로 속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 어느 것도 양자택일의 대상은 아니다. 버리고 피할 수도 없고, 다만 스스로 극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이다.

그에게 모든 것이 여전히 오랜 전통과 커다란 권위로서 경외의 대상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없이 어리고 나약한 자신과 배회하고 방황하면서도 늘 동경하고 꿈꾸는 자신을 동시에 보았을 것이며, 바로 그 경계에서 부단한 극복 의지를 표명하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왔다.

작가 스스로 화면 속 고뇌하는 존재, 외롭고 소외된 존재, 부유하는 존재들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이러한 유한하고 파편화된 익명적인 존재 영역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붙이고 중첩시키며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무언가를 동경하며 꿈꾸는 듯한 눈빛의 어린동물들을 그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2011년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했었다.

2012년 이번 개인전의 「이종결합」과 「유목동물」시리즈를 통해 여러 색면과 한자 바탕면을 배경 삼아 당당한 행위자로서, 성장한 준마(駿馬)와 맹호(猛虎)를 전면에 부각시키며 본격화하고 있다.

이질적인 힘의 관계망을 통찰하며 역사와 전통과 호흡하는 미래, 무한한 시공의 흐름을 주도해가는 인간 주체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며 행동하는 상상의 원천으로서 말(馬)과 말의 도약하는 몸짓이다.

전통과 새로움, 형상과 서사라는 양날 사이에 선 작가 허 진.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세계를 구성하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관계망, 그리고 이들 길항적 세력관계의 역동적 에너지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시선이다.

도도하고 단단한 권위들, 그 첨예한 경계들을 넘어서 상생과 공존을 꿈꾸는 작가 허진(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의 새로운 도약으로서, 이번 유목적 그물망에 대한 유희적 상상, 그 아름다운 변모의 역동을 기대해본다.

△조성지(예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