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명인간-여로10, 2007, 한지에 수묵채색, 130×162cm/Anonymous Human-a Journey10, 2007, ink and pigment on hanji, 130×162cm

허진 회화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체와 마음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우리의 마음과 신체의 욕망은 이성이나 지성보다 훨씬 자유롭고 보다 다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유목적인 차원이 강하다.

그것은 들뢰즈(Gilles Deleuze)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가 정의한 각종 관습적이고 코드화된 억압으로부터 끝없는 탈주를 꿈꾸고, 모든 표준화의 권력에 저항하며 무작위한 새로운 연결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본능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망으로서의 세계는 허진의 작품을 읽어내는 중요한 코드가 된다.

이성에 갇힌 신체의 감각과 이미지의 세계를 복원하기 위해 그가 취하는 방식은 먼저 과거에 경험한 어떤 인상적 사건이나 사물을 불러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들은 그의 기억 속에 잠재적 양태로 존재하는 이미지들이다.

▲ 익명인간-여로10, 2007, 한지에 수묵채색, 130×162cm/Anonymous Human-a Journey10, 2007, ink and pigment on hanji, 130×162cm

최근 그의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동물들은 2002년 일본을 여행하고 나서부터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당시 그는 일본 나라에 있는 고후쿠지(興福寺)에서 푸른 전원에서 울타리도 없이 동물들이 인간과 하나 되어 어우러져 노니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러한 생태적 이미지에 대한 강한 기억은 그의 관심사를 변화하게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이전까지 <익명인간>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허진의 작품은 주로 위선적인 인간을 풍자하는 현실비판적인 작업이었다. 다소 표현적이고 해체적이었던 그의 작품은 2002년 일본 여행에서 얻은 이미지에 의해 보다 긍정적이고 생태적인 작업으로 변모케 되었다.

그의 작업은 자신의 기억 속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생태적 이미지를 일단 끄집어낸 뒤 그것의 의미를 어느 특정한 맥락에 고정시키지 않고 마음의 미끄러짐을 따라 다소 발생론적인 창발에 손을 맡긴다. 그럼으로써 예키지 않은 구성방식이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이처럼 다소 즉흥적이고 우연에 의존한 구성방식이 정합성을 부여받는 것은 시각의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논리이다. 그는 마음의 논리에 의해 전개되는 운동변화와 이미지의 자율성에 탐닉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의 이미지들은 어떤 기준이 되는 축이나 중심이 존재하지 않고 상하좌우 횡단하며 가로지르고 뒤섞인다.

생태적 담론을 간직한 그 이미지들은 화면에 그려짐과 동시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감각적인 터치와 창발적 구성에 의해 와해되고 새로운 질서화가 이루어진다. 최근 그의(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점(dot)들을 특수한 사실성을 약화시키고 대상을 익명화시켜 초월적 공명을 가능케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최광진(미술평론가, 理美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