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명인간-여로6, 2003, 한지에 수묵채색, 130×162cm/Anonymous Human-Journey6, 2003, ink and pigment on hanji, 130×162cm×5pieces

그의 아들이 TV를 보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대하고, 그것들의 이름을 알고, 생태에 대해서도 아는 것 같지만, 한 번도 그것들을 쓰다듬어 본 적도, 실제로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강아지를 껴안고, 함께 뒹굴고 하는 직접적인 교감보다는 TV수상기를 통해 보고 이해하는 상황, 현실감과 진지함이 결여된 가상현실이 현실을 대신하는 본말전도, 명실상부하지 않은 상황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허진(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 은 이러한 상황에 분개하며, 이를 표현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두가,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소외당하는 현실을, 또 그로 인해 비롯되는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고, 역사를 제거하고, 온갖 망상과 개인적인 상상을 제거하고, 그것 자체만에 집중하는 태도가 모더니스트들의 태도이다. 그래서 대상의 형태와 재질과 색채에 모든 가치를 두는 조형적 태도가 모더니스트들의 것이다.

▲ 익명인간-여로6, 2003, 한지에 수묵채색, 130×162cm/Anonymous Human-Journey6, 2003, ink and pigment on hanji, 130×162cm×5pieces

허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대상들은 이러한 모더니스트적인 관점에서 관찰되고,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신체이야기]에서는 위장, 심장, 신장, 안구와 혀, 자궁 등등이 각각의 도안적인 형태를 갖고 한 점의 작품을 이룬다. 그것들의 유기적 관계와 중요성들은 모두 제거되고, 하나씩 분리되어 무용지물인 단편들로 재현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특별한 형태가 그려진 물건, objet가 되고, 이 특별한 물건은 예술작품이 된다. 20세기 미술사는 이러한 특별한 것을 전 세계적으로 교육시켰고, 유행하게 했고, 예술작품으로 유통시켰다.

그래서 그것이 아닌 것은 진부하거나 낙후된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더니즘 시각의 일반화, 보편화는 예술의 소통기능을 저해한다. 무의미를 지고의 상태로 여기는 것은 작가로 하여금 의미의 착상과 발전, 관객과의 대화를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의미를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필요 없는 혹처럼 여기는 태도는 작가들의 상상력, 창의력을 저해한다.

작품은 그 전에 제작되었던 작품들의 요소들을 토대로 해서 제작되어야 더 순수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 양식의 한 점 작품 앞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고, 서로 교환하면서 토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을 단순히 조형에 그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색채나 형태, 재료 등이 잠시 시선을 끌지만 그것으로 전부인 것이다.

△오병욱(동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