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멈출 수 없다> 멜린다 게이츠 지음, 강혜정 옮김, 부키 펴냄.

저자는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공동의장이다. 남편이 MS 빌 게이츠라는 이유만으로 2000년 재단 설립 당시 '부자집 사모님의 품위 유지 활동'쯤으로 폄하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주도하는 재단은 주목할만한 활동상을 보이며 세계 최대 자선단체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멜린다는 남편 빌과 함께 350억달러(약 41조7000억원)을 기부했다.

책에는 20년간의 재단 활동상이 소개돼 있다. 한 켠에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 한 명의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담담한 고백도 담았다. 하지만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빈곤과 질병의 근본 원인을 천착해 들어가는 멜린다의 집념과 통찰력이다.

멜린다의 첫 국제적 사업은 백신 보급이었다. 빈곤국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말라위, 니제르, 나이로비, 인도 등 질병과 빈곤이 극심하고 영아 사망률이 높은 지역을 숱하게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피임약을 간절히 원하는 수많은 어머니들을 마주했다. 빈곤과 피임약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멜린다는 이 화두에 매달린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가난한 여성들이 피임약의 도움으로 가족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터울을 조절할 수 있다면 돈을 벌거나 공부를 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자녀 양육에 필요한 음식이나 환경을 마련할 금전적 여유가 생길 수 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태어나 자랄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게서 잠재력을 끌어내면 그들은 오랜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피임약 배포와 가족계획이야 말로 멜린다가 발견한 빈곤과 질병을 종식시키는 가장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멜린다의 지론은 “여성의 권한이 강화되면 인류는 번영한다”이다. 배제되어 있던 집단을 포함시킬 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마련이다. 여성을 사회의 각 역할에 포함시키고 지위를 높일 경우 교육 수준, 고용률, 경제 성장률은 올라가고, 십대 출산율, 가정폭력 피해, 범죄율은 낮아진다.

멜린다의 철학에 따라 재단은 산모와 신생아 건강, 가족계획, 여자아이 교육, 무급 노동 문제, 조혼, 여성 농업 종사자, 여성의 직장 문화, 성 노동자 문제를 9가지 세부 사안으로 지정하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재단의 활동에는 문화적, 경제적, 법적, 종교적 제약들도 가해지고 있다.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인 멜린다가 ‘길을 잃었고’ ‘허위 정보와 잘못된 방법으로’ 기부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재단 사업의 핵심 지역인 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여성 차별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전통과 관습이 활동을 막아서기도 한다. 모두가 여성 차별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멜린다는 “벽이 곧 문”이라고 말한다. 벽을 마주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자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의 권한 강화’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남성에 맞서기 위해 여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남성들을 포함한 인류를 위해서 여성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