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거주하는 박모씨(55세)는 지난해 파산신청을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박씨는 5년전에 창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해 3억원의 빚을 떠 안고 개인회생으로 3년동안 다달이 빚을 갚았다. 박씨가 소득이 끊기면서 더는 빚을 갚을 수 없어 파산절차를 알아본 것. 박씨는 파산절차에 40종의 서류가 필요하고 부모와 자녀의 자산 관련 서류도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빚 독촉을 받고 있지만 파산신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거주하는 최모씨(여·58세). 그는 지난해 여름 법원에 파산신청서를 내고 아버지와 심하게 다퉜다. 최씨는 법원으로부터 아버지의 재산 보유 현황을 제출해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부동산 임대업을 하는 최씨의 아버지는 “자녀의 파산신청에 자신의 재산 관련 서류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며 서류제공을 거부했다. 아버지의 거부로 최씨의 파산절차는 더 진행되지 못하고 중지됐다. 

[이코노믹리뷰=양인정 기자] 올해부터는 파산절차에서 발생하는 이런 모습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법원이 새해부터 개인파산의 필수 제출 서류를 14종 안팎으로 제한하도록 하는 ‘개인파산 및 면책신청사건에 관한 개정 예규’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기존 파산절차에서는 채무자는 약 35종에서 최대 50종에 가까운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예규에는 배우자나 친인척의 재산 증빙서류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파산 선고 이후에는 파산관재인이 파산 관리·감독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추가 서류만 제출하도록 했다. 예규는 이달 20일 전국 파산법원에서 시행된다.

파산절차는 빚을 모두 면책하는 법원의 빚 탕감 제도다. 소득과 재산이 없는 채무자가 다달이 갚는 개인회생 제도를 이용할 수 없을 때 신청하는 절차다. 채무자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고 취직 등 경제활동을 장려하려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종래 파산제도에서는 법원이 방대한 분량의 서류와 가족의 재산 보유 현황 등 개인정보 등 서류를 요구했다. 채무자가 재산을 숨겼는지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례와 같이 서류의 준비에 많이 시간이 걸리고 가족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절차 진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파산법조계에서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있었고 파산절차를 밟는 채무자가 엄격한 조사에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았다. 법원이 제도 개선에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산신청 서류. 사진=이코노믹리뷰 DB

◆ 바뀐 준비서류 살펴보니

대법원 예규의 개정으로 파산 준비서류는 대폭 줄었다. 채무자 본인이 아닌 가족의 서류는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법원이 한정한 채무자의 구비서류 14종은 이렇다.

△가족관계증명서(상세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상세증명서) △주민등록초본 △주민등록등본 △과거 1년간의 입출금이 기재된 통장 사본 또는 예금거래내역서 △생존자 보험가입내역조회, 예상해약환급금 내역 등이 기재된 각 보험회사 작성의 증명서 △임대차계약서의 사본 등 임차보증금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 △부동산을 소유한 경우, 부동산등기부

△자동차를 소유한 경우, 자동차등록원부와 시가 증명자료 △연체시점의 1년 이전부터 파산신청 할 때까지 사이에 처분한 재산내역 △최근 2년 이내에 이혼을 한 경우, 이혼에 관한 재판관련 서류 △수입에 관한 자료(급여명세서 등)

△채무자에 대한 지방세 세목별 과세증명서 △개인영업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경우, 사업자등록증명, 휴·폐업사실증명, 등 8종류의 세무 관련 서류 

채무자는 종래 부모와 자녀의 재산세 과세 현황, 부동산, 보험, 자동차 등 보유현황을 나타내는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 취약계층 채무자 바로 면책...“재산은닉·거짓말 의심 철저 조사”

파산법조계는 광범위한 조사가 필요 없는 극빈자 등 취약계층이 보다 파산제도에 접근이 쉬울 것으로 내다봤다.  

따라서 △오래전 폐업한 채무자 △노숙자처럼 어렵게 살아온 채무자 △십수 년 전에 재산을 처분하고 살아온 채무자 △오래전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이혼하고 별거한 채무자 등은 앞으로 복잡한 절차 없이 즉시 면책이 가능해진다. 신속한 경제활동이 가능하다는 것.

서류가 줄어들고 취약계층에 대한 면책이 빨라진다고 해서 재산은닉 등 의심이 되는 채무자도 면책이 쉬운 것은 아니다. 파산관재인은 채무자가 재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이 들면 종전과 같이 엄격한 조사를 할 수 있다. 

서울회생법원 파산관재인 홍현필 변호사(홍현필 법률사무소)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의심 사례는 이렇다. 

△사업이 큰 규모로 이루어졌는데도 채무자가 10년 동안 아무런 재산을 취득한 사실이 없고, 부친 집에 무상으로 거주한다고 말한 경우 △상속을 받고도 연체상태에서 채권자들의 경매가 걱정돼 아들에게 증여한 경우

△채무자가 자녀 명의로 사업을 하는 상당한 의심이 드는 경우 △관재인 조사과정에서 재산변경을 채무자가 보험계약 변경, 임대차계약 변경, 차량 이전 등록 등 스스로 재산관계를 변경하는 경우 △특정 연도의 고소득 시점에 모친이 부동산을 취득한 경우 등이 그것이다.  

홍현필 변호사는 “재산을 숨기거나 파산신청에 앞서 재산을 팔고 현금화하고도 알리지 않는 등 기초서류 통해 의심사항이 나오면 파산관재인은 채무자의 친·인척에게 재산을 숨겼는지 조사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하면 파산관재인이 법원에 보고, 법원이 채무자에게 불이익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