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 1995, 한지에 수묵채색, 195×112cm/Anger, 1995, ink and pigment on hanji, 195×112cm

허진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사회 문화적 규범이나 제도들이 무언의 압력이나 폭력으로 다가옴을 느끼고 표출하고자 한다. 우리사회의 산업화 서구화가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말살하고, 우리를 획일화된 삶의 굴레 속에 가두고자 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만연된 사회문화적 병폐와 부조리들로 인해 일그러진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즉 허진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에 의해 우리가 억압되는 상황을 드러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내면의 충동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허진의 예술적 작업에는 권력과 자본에 대한 숭배와 그것들의 횡포 속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에 대한 향수가 깔려있다.

▲ 달려라 슬퍼맨1, 1995, 한지에 수묵채색, 123×160.5cm/Go, Go, Go! Salaryman in Sackcloth and Ashes1, 1995, ink and pigment on hanji, 123×160.5cm

허진(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의 작품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힘-권력이나 제도적 힘, 냉혹한 자본주의적 경제논리 등과 같은-에 대한 묘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움켜쥔 손, 우리를 유혹하는 상품들의 이미지, 총. 칼 등의 폭력적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우리 삶의 부조리한 모습들이 서로 상반된 이미지들-웃는 얼굴의 뒷면에서 배어나오는 고뇌라든가 서구적 이미지와 그것과 융합되기 힘든 한자(문화)의 병치 등과 같은-을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감성을 말살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상품화 전략에 대한 비판도 있고, 자연 생태계의 파괴라는 부산물을 수반하는 문명의 뒷모습에 대한 고발도 있다.

이것들 속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초상과 절규 섞인 표정, 어두움에 가리어진 눈을 갖고 살아가고 있음을 표출하기도 하고,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우리 내면의 충동을 무언가를 향해 달려 나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들로부터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또 다른 생각을 뒤엉켜진 군상들의 모습 속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박일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