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중인간(多重人間)-불덩어리, 1995,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73×146cm/Multiple Human-Ball of Fire, 1995, ink and pigment onseveral kinds of paper, 173×146cm

허진이 보여주고 있는 「다중인간」의 연작물들은 「默示」와 「流轉」으로 제명된 과거의 작품군들과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그 맥을 같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작품상의 변화의 이면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동반되게 마련이다.

아니, 동반된다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철저하게 바꿔놓는다고 보는 편이 옳은 말일게다. 과거의 그가 다시점적인 서술, 시제의 동시적 표현법,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원환체계에 근거한 역사의 순환적 서술성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현재의 그는 좀 더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과 본질, 그리고 그 이미지의 탐구로 되돌아와 있다.

이러한 그의 시각의 변모와 거기에서 드러나는 도상은 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가 과거에 그려왔던 인물의 도상이 다분히 해체된 형식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대체로 사실주의적 범주 내에서의 변용된 이미지였다.

▲ 다중인간(多重人間)-레디고!!, 1995,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30×193.5cm/Multiple Human-Ready Go!!, 1995, ink and pigment on several kinds of paper, 130×193.5cm

반면에 이번 전시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인물의 도상은 철저하게 반사실적 관점에서 표현되고 있다. 부조적 질감을 강조하고 화면의 깊이를 철저하게 배격한 채, 인물의 형상을 가장 물질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점이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는(ARTIST HUR JIN,許塡,허진 작가,한국화가 허진,HUR JIN,허진 교수,허진 화백,A Painter HUR JIN) 형상들을 물질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화면의 검은 밑바탕 칠이 윤곽선처럼 드러나게 꾸미고 있는데, 이것은 화면내의 여러 대상들 간의 긴장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에 푼 반고체 상태의 종이를 화면의 검정바탕 위에 아교를 먹여 부착시킨 후, 먹의 번짐효 과를 자연스럽게 이용해 그려내고 있는 인체의 형상은 흡사 엑스레이로 투시했을 때, 혹은 네거티브(negative)로 인화된 필름에서 드러나는 그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종승/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