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직접 물감을 묻혀 「캔버스」위에 군데군데 점을 찍듯이 문지르는 따위의 행위의 신선함을 통해 물감을 비물질화(非物質化)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행위에 어떤 리듬감이 실리고 집합적인 요인이 형성되기 시작하더니 대(帶)개 생기고 계단(階段)과 유사한 상(像)이 떠오르게 된다.

처음에는 표현의 신선함이 있는 대신 절제되지 않은 거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차츰 화면의 균질(均質)이 가해지고 화면 전체를 덮어버리게 되면서 마침내 「캔버스」라는 4각(四角)이 하나의 단위(單位)로 변하고 만다. 상(像)이 겹쳐지고 마음이 포개지면서 캔버스는 하나로 통일(統一)되는 것이다.

이 때 최명영은 새로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행위의 반복이 주는 의미, 즉 「상(像)이 겹쳐지고 마음이 포개지는」현상(現象)을 평면의 한계에서 이끌어낼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점이 제기된 것이다. 이래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평면이 아님을 확인하고픈 열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평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내 평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고민에 빠져있던 어느 순간, 그는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문지를 때 감득 (感得)되던 「캔버스」천 자체의 돌출(突出)이 주던 미묘한 촉감을 문득 되살리게 된다. 그래서 그는 종이에 먹물을 덮은 뒤 뒤에서 솔로 두드려 화면에 「마티엘」을 냈다.

이 같은 작업을 반복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평면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화면에 나타난 그 「마티엘」은 존재가 밖으로 확산(擴散)되면서 동시에 화면으로 외부세계를 불러들이는 작용을 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면(캔버스)을 규정짓는 틀, 즉 평면과 바깥세계와의 접점(接點)이 문제였다. 화면의 전후(前後)는 평면으로서의 한계극복이 가능하지만 이 「바깥세계와의 접점」은 여전히 평면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도된 것이 바로 오늘의 「평면조건」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캔버스」측면을 물감으로 쌓았다든지 혹은 둥글게 갈아내는 등 몇 차례의 단계적인 모색기(摸索期)가 있었다.

화면 전체를 물감으로 덮어씌웠을 때 「외부세계와의 접점」은 자연히 입체화(立體化)되었고, 모든 작업이 하나의 단일면적(單一面積)속으로 통합되면서 심리적인 안정도가 훨씬 높아졌다.

하나의 단위에서 비롯되는 작업의 확실성과 보다 넓은 세계로의 지향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같은 방법을 되풀이하는 데서 오는 질량감(質量感)은 최초로 평면, 즉 「캔버스」의 존재성을 삼켜버리고 만다.

「캔버스」의 존재성이 사라짐으로써 완전한 입체평면이 실현되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형을 새롭게 운명 지워 주는 측면의 다양한 표정은 그의 작업을 하나의 자연현상(自然現象)으로까지 승화(昇化)시켜주고 있다 할 것이다.

최명영(단색화가 최명영,Korean monochrome painter CHOI MYOUNG YOUNG, Dansaekhwa CHOI MYOUNG YOUNG,최명영 화백,최명영 작가,단색화 최명영,韓国単色画家 崔明永)은 최근 여기에서 다시 새로운 사실을 추적하고 있다.

이제 까지 거듭해온 「평면조건」을 보다 객관화(客觀化)시키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평면조건」이라는 하나의 단위를 여러 개로 펼쳐놓고 조각조각으로 모인 즉, 개개의 단위가 어떤 형태로 새로운 전체를 이루며 또 그 전체는 역(逆)으로 어떤 통일감(統一感)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

△신항섭, 미술평론가(現代美術의 位相, 화성문화사刊,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