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시대는 발전하고 기술은 진화하며 사업 트렌드는 변합니다. 2020년 원더키디의 예언이 며칠 남지 않은 현 상황에서 갑자기 해시계 사업을 하겠다고, 측우기로 기상관측 사업을 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사양사업이라는 것은 존재합니다.

결국 구사업은 사라지고 신사업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인데, 문제는 그 연결과정을 ‘어떻게 매끄러운 방식으로 끌어내느냐’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신사업이 합법의 틀에서 세상의 진화를 꾀하고,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구사업 종사자들에 대한 정부 등의 적절한 지원이 이어지는 한편 이들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다만 구사업과 신사업의 연결, 즉 접점 과정에서 간혹 괴이한 일들이 생겨 눈길을 끕니다. 신사업이 등장하는 순간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무조건 밀어내려는 누군가의 ‘선동’과 ‘어설픈 단말마’가 연출하는 한 편의 희비극입니다.

도장 찍어주는 로봇

최근 일본 로봇 기업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즈는 신박한 로봇을 공개해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이들은 소형 로봇팔과 문서 인식용 스캔 카메라로 이뤄진 자동 날인 로봇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이 로봇을 2019 국제로봇전에 정식으로 공개했습니다.

자동 날인 로봇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사람이 보고서 및 계약서 등 문서에 도장을 날인하는 것은 번거러운 일이니, 이를 자동으로 날인하는 로봇을 만들었다는 설명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몇 장의 문서에 날인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수 백장의 문서에 날인을 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도장을 찍는 담당자의 팔이 아플 수 있으니까요. 자동 날인 로봇은 이를 돕는 셈입니다. 물론 문서를 세세하게 확인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원래 문서작업이라는 것이 그렇고 그렇잖아요?

로봇은 의외로 정교합니다. 정확히 문서를 인식하고 이를 넘겨야 하고, 또 도장을 찍을 곳을 세밀하게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작업을 빠르고 자동적으로 해낸다는 것이 회사의 설명입니다.

들어보면 말이 되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하면 뭔가 기괴하고 기묘합니다. 보겠습니다.

로봇의 경우 현재 많은 공장에 도입되어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으니, 도장을 자동으로 찍어주는 로봇 정도는 하나 등장해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자문서시스템이라는 향상된 기술을 가지고 있잖아요? 결국 고리타분한 종이문서에 자동으로 도장을 찍으려 최첨단 로봇을 사용하는 장면은, 마치 자율주행차 시대를 맞아 걸을 때 사용하는 짚신에 땀차지 않도록 하려고 최첨단 선풍기를 탑재하는 것 같습니다.

▲ 도장 날인하는 로봇. 출처=히타치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즈 등 소위 괜찮은 기술을 가진 회사들이 왜 로봇으로 도장을 찍는 로봇을 만들었을까. 왜 짚신에 고급 선풍기를 탑재하려고 할까.

간단합니다. ‘전자문서시스템’이라는 신사업이 등장한 상황에서 ‘고리타분한 종이문서 활용’이라는 구사업을 어떻게든 연명시키려는 발작적인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전자문서시스템이 등장하면 고리타분한 종이문서 활용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또 업무의 효율성 등을 고려할 때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 종이문서 활용에 목을 매는 구사업 이익집단은 어떻게든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하며, 그러면서도 신사업과의 관련성은 있어야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런 ‘역대급 광대놀음’에 나서는 셈입니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 치밀한 노림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전자문서시스템이 훌륭해도 당장은 고리타분한 종이문서 활용이 생명력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장수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이런 로봇을 만들겠지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 이런 로봇을 만들었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격인 일본의 다케모토 나오카즈 과학기술 IT 담당 장관은 ‘일본의 도장제도와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도장의원연맹) 회장입니다. 도장의원연맹은 지금까지 전자문서시스템을 추구하려던 모든 시도를 강력한 로비로 무력화시켰고, 그 중심에 국가의 IT사업을 총괄하는 다케모토 나오카즈 장관이 버티고 있는 셈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재래시장 번영회 회장이 인근 대형마트 사장으로도 활동하는 셈입니다.

▲ 전자문서시스템이 대세다. 출처=갈무리

낯설지 않다

모든 신사업이 구사업보다 무조건 발전했으며, 이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시대는 발전하고 기술은 진화하며 사업 트렌드는 변하는 법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업의 트렌드가 구사업에서 신사업으로 전환되며, 구사업의 반발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를 중재하고 가이드 라인을 세우는 것이 정부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뭔가 기괴합니다. 고리타분한 종이문서 활용이라는 구사업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 방식이 구사업의 본질을 무조건 살리면서(종이 도장 날인) 신사업의 껍질(도장 날인하는 로봇)만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도장연맹의 회장인 다케모토 나오카즈 장관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구사업 과보호까지 더해지며 사태는 더욱 기묘해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현해탄 건너 일본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일’로 치부하며 좋으련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너무 비슷해 씁쓸해집니다.

바로 모빌리티 업계입니다. 국토교통부는 플랫폼 택시와의 협력이 없으면 아예 새로운 모빌리티 가능성을 타진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내 모빌리티는 택시라는 구사업의 본질은 여전한 상태에서 모빌리티 서비스라는 껍질만 뒤집어 쓴 형태가 됐습니다.

실력행사를 통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며 기술의 껍질만 찾는 구사업 종사자들, 그런 구사업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지 않고 “무조건 살려줄게”라며 길을 열어주는 정부, 껍질로 소모되며 “이렇게라도 사업하는 것이 어디야”라며 안도하는 기술. 일본의 도장 날인 로봇과 한국의 플랫폼 택시는 비슷한 구석이 참 많습니다.

다만 일본의 사정이 더 나아 보이기는 합니다. 도장 날인 로봇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도장의원연맹은 “도장 날인이라는 일본의 유구한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장 날인을 유구한 전통으로 봐야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통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약간의 당위성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택시업계를 ‘전통적으로 보존’하려고 합니다. 약간 다른 의미로 염세적 세계관의 2020 원더키디 예언이 조금씩 현실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IT여담은 취재 도중 알게되는 소소한 내용을 편안하게 공유하는 곳입니다. 당장의 기사성보다 주변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지점에서 독자와 함께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