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누군가가 말했다. "이 세상은 80대 20의 세계"라고. 20%의 사람들이 나머지 80%의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혹은 80%의 부를 가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 그래서 어떤 이들은 취업이나 진학에 성공해 20%안에 들기 위해 정당 원내대표 혹은 전직 법무부장관을 아버지로 두는 ‘혈연 스펙’까지 활용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절대 다수인 80%의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어떻게 해소될까. 그 80%의 사람들이 마음 깊은 곳에 가둬두었던 ‘비주류의 감성’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됐다. 

우리 안에 갇혀있었던 한 마리의 '흑염룡(흑염룡(마음 깊숙한 곳의 욕망 혹은 분노를 표현할 때 쓰는 인터넷 신조어)'이 온라인이라는 공간을 통해 ‘B급 감성’ 문화 코드로 변해 포효하기 시작했다.  

▲ 출처= 애니메이션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화면 캡쳐

B급 감성의 역사 

B급 감성의 역사는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대 독일에서는 상류층들이 향유하는 고급 예술의 범주에 들지 못한 그림이나 음악 등 소위 말하는 ‘하찮은 예술품’들을 비꼬는 말로 키치(Kitsc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에는 ‘중산층들의 낮은 수준에 맞춘 그림이나 예술품’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키치적 예술작품들은 보이는 그대로가 곧 의미인 직관성(直觀性),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소재로 한 직설적 표현 혹은 사회 주류들을 비웃는 속성이 묻어난다. 대표적인 키치 예술로는 이후 만화(漫畫)와 애니메이션의 시초가 되는 카툰(Cartoon·이야기가 있는 그림)이 있다. 

이처럼 주류 예술계의 무시를 받던 키치적 속성의 예술작품들은 20세기에 들면서 그 자체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받기 시작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대중의 예술’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키치는 신문연재 만화, TV의 코미디 프로그램, 웃긴 이야기 모음집, 영화 등 문화 콘텐츠로 발현된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인터넷 기술이 발달하면서 키치적 속성의 콘텐츠들은 그 표현법이 확장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웹툰(Webtoon)’과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다. 이 두 콘텐츠는 인터넷 공유를 기반으로 확산되는 ‘병맛’ 감성 콘텐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 전설의 웹툰 '마린블루스'.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긴 서사의 스토리텔링이 아닌 피카레스크(Picaresque·독립적 이야기들의 나열)식 에피소드에 최대 5분을 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단편의 개그·일상 웹툰과 애니메이션에 초등학생부터 어른들까지 열광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기를 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병맛 콘텐츠들로는 웹툰 ‘마린블루스’(2001), ‘마음의 소리’(2006년 첫 회가 나온 이후 현재까지도 연재 중), 플래시 애니메이션 ‘졸라맨’(2000), ‘마시마로’(2000) 그리고 성인향 플래시 애니메이션 ‘오인용 시리즈’(2002)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개그 요소 혹은 등장 캐릭터들의 희화화 등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다만 ‘오인용’ 시리즈의 경우 과격한 욕설과 인신공격에 가까울 정도로 특정인물을 작품 속에서 희화화해 표현한 것으로 비판을 받기는 했으나 중학생부터 성인까지 즐기는 큰 파급력을 보여준, 당대를 대표하는 B급 감성 가득한 콘텐츠임에는 틀림없었다. 

B급 감성 전성시대 

B급 감성 콘텐츠의 활용 가능성을 극대화시킨 것은 바로 글로벌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유튜브다. 빠른 콘텐츠 확산과 즉각적 피드백이 동시에 이뤄지는 유튜브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한 영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B급 감성 콘텐츠들의 인지도도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최근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B급 감성의 선두주자는 EBS(한국교육방송공사)가 청소년과 더불어 청년, 직장인 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만든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 펭TV의 펭귄 캐릭터 ‘펭수’다. 남극에서 헤엄쳐 한국으로 건너 온 10살 자이언트 펭귄이자 ‘EBS의 연습생’이라는 콘셉트를 가진 펭수는 그간 주로 어린이 프로그램에 등장해 온 EBS의 인형 캐릭터들이 ‘절대로 보여 줄 수 없는’ 직설 화법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펭수는 영상에서 EBS 김명중 대표이사의 이름을 부르거나 선배 인형 캐릭터의 갑질에 무시로 화답하는가 하면, 어리버리한 매니저에게 온갖 핀잔을 주며 잔소리하는 등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상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폭풍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펭수는 국가기관 홍보영상부터 라디오 방송, 예능프로그램에 출연에 이어 단독으로 패션지 화보를 찍는 광폭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 요즘 대세 캐릭터 '펭수' 출처= 유튜브 채널 자이언트펭TV

펭수 이전 B급 감성의 대표적 성공사례는 애니메이터 유튜버 ‘장삐쭈(본명: 장진수)’의 ‘병맛더빙’ 시리즈가 있었다. 병맛더빙은 70~80년대 인기 애니메이션의 특정 장면들을 편집해 웃긴 상황을 설정하고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장삐쭈 본인이 혼자 녹음(더빙)한 영상이다. 익살 넘치는 특유의 말재간과 중·고등학생들이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문체인 ‘급식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한 화려한 말장난으로 주목을 받은 유튜버 장삐쭈는 구독자 200만명을 보유한 인기 유튜버가 됐다. 이후 전문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팀을 꾸린 장삐쭈의 콘텐츠는 TV 예능 프로그램, 브랜드 광고, 마케팅 콘텐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창작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유튜브의 특성은 B급 감성을 만나 기업이 의뢰한 광고에 작심하고 광고주인 기업을 놀리는 내용을 담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크리에이터 ‘반도의흔한애견샵알바생(본명: 허지혜)’의 영상 ‘본격 LG 빡치게 만드는 노래’는 생활용품기업 LG생활건강으로부터 의뢰받은 온라인용 신제품 세제 영상광고다. 주말을 맞아 클럽에 놀러 간 사이 업무를 요청한 LG생활건강 마케팅 담당자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크리에이터의 분노를 온갖 엽기적인 영상에 덧붙여진 욕설 섞인 노랫말로 표현한 것이 영상의 내용이다. 상업광고라기엔 다소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 영상은 단숨에 200만 조회 수를 넘기며 LG생활건강이 당초 기대한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거둔다. 심지어 LG생활건강은 이 크리에이터에게 한 번 더 영상을 의뢰하는 ‘대인배’의 모습으로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방송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미친 B급 감성 유튜브 영상도 있다. 종합편성채널 JTBC의 디지털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콘텐츠이자 335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워크맨(Workman)’은 현재 각종 상업 브랜드 광고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인기 콘텐츠다. 워크맨은 수많은 직업군에 JTBC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장성규가 하루 동안 직접 일해 보면서 겪는 일들을 담아내는 영상이다. 특히 영상에서 돋보이는 것은 개그맨을 능가하는 장성규의 입담과 더불어 워크맨 이전에 그 어떤 콘텐츠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영상 자막의 배치다. 자막 텍스트가 영상 하단에 고정되는 고전적 예능 프로그램 의 문법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자막으로 등장인물의 얼굴을 가려버리거나 얼굴로 글자를 만드는가 하면, 영상 속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 텍스트가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법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제는 공중파나 케이블 채널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워크맨의 자막 배치 스타일을 따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 B급 감성이 넘치는 이마트의 만물상 '삐에로쑈핑'. 출처= 이마트

B급 감성의 활용은 콘텐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난해 7월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이 야심차게 선보인 만물상 잡화점 ‘삐에로쑈핑’은 마케팅부터 점포의 구성까지 대놓고 B급을 추구하는 유통 채널이다. 삐에로쑈핑은 일본 돈키호테에서 가져온 만물상 콘셉트에 우리말 드립(말장난)으로 채운 점포 내 디자인과 구성으로 B급 감성을 한껏 구현했다. 삐에로쑈핑은 B급 감성의 재미에 감응하는 젊은 소비자들에게 ‘핫 플레이스’로 여겨지면서 운영 1년 만에 방문객 400만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운영 주체인 이마트의 자체 조사에 따르면, 삐에로쑈핑의 전체 매출 중 20대~30대 고객의 소비가 약 50%에 이른다. 이에 힘입어 삐에로쑈핑은 서울 등 수도권에 이어 부산 지역까지 매장을 내며 상권을 확장하는 성장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