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니는 아들이 이번 가을 추석 연휴에 아프리카로 휴가를 가겠다고 얘기를 합니다. 아프리카 어디냐고 묻자, 콩고 공화국. 무엇 그리 특별한 관광 대국도 아니고, 개인적인 인연도

없어 보이고, 분쟁이나 풍토병 등 여러 위험 요인이 먼저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거기 가는가 물었지요. 몇 년전 학생 시절 파리 여행 중 만난 콩고계 프랑스 여자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마침 콩고를 가는데 함께 갈 기회라서 선뜻 동행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몇 번이나 만난 사이냐, 또 신뢰할 만하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이 좀 이상하다면서도 파리서 한번, 한국에서 한번 만난 그저 친구 사이라 답합니다. 25년 전 남아공, 에디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를 두 번 출장 갔었는데, 아주 고생한 기억과 위험했던 일도 생각되었고, 추석 때 다들 고향 가는데, 고국 방문하는 친구를 따라 엉뚱한 데 가는 아들이

한편으로 어이없어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지요.

얼른 콩고 공화국을 찾아보았습니다. 아프리카 서부 위치, 60년 프랑스에서 독립, 92년에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 정부가 들어섰고, 우리 교민이 25명 살고..

좀 위험해도 보였고, 그리 신뢰할 만한 인연으로 가는 것도 아니어서 좀 더 안전하고 멋진 데로 가라고 얘기하려다 포기했습니다. 옛날 같으면 잔소리꾼, 걱정 대마왕 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반대를 했겠지만, 아들이 직장에 들어가고 부터는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설득이

될 것 같으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말을 아끼죠.

부자 관계는 최소 살리자는 취지에서 그렇게 돌아섰는데, 이게 과연 옳은지 모를 일입니다. 나와 내 부친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런 사안일 경우, 확실한 반대가 예상되어 실행을 아예 안하거나 다르게 얘기하고 갔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아들과 갈등이 생기면 여전히

불편합니다. 편하지 않은 마음을 당장의 말 대신 일기에 남기거나 후에 얘기를 하곤 하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지방으로 짧게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덮어두었던 아프리카 여행 건을 다시 꺼내려다 그만 두고, 대신 내가 아들에게 진짜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현대 시인 필립 라킨의 시가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널 망친다.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결핍을 전해주는 것도 모자라, 너만을 위한 결점까지 추가해주지‘

부모의 역할에 대해 너무 냉소적인가요? 이제까지의 아들 양육 시기에 알게 모르게 개입하고, 간섭하며 여기까지 왔겠고, 그 시인의 지적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내가 아들에게 진짜 기대하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했더니 아들이 선택받는 삶이 아니라,

좀 더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거였습니다.

힘든 아프리카나 인도를 가겠다고 하는 것도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는, 꿈꾸어보는 몸짓이리라 생각되었습니다. 지금사라도 과거 부족했던 자유롭게 꿈꾸고, 결정하는 것을

안 하면 훗날 꿈이 없는 어른이 될 것 같다는 불안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이제라도 아들의 인생을 살도록 도와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휴가지 숙소 헬스장에서 우리에게 근력 운동 시키며 마지막 힘든 것이 근육이 되는

법이라며 한번이라도 더 시키려 애쓰는 걸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내가 잘 견디어줌이 그런 아들로 가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내 성숙과도 연결될 것 같았습니다. 나이 들수록 사람은 철학자가 되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적게 행동하고 더 적게 말한다고 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