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구권협정’체결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모두 소멸한 것인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사건’과 관련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1965. 12. 18.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 체결로 인해 일본 정부 및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였는지의 여부였다. 실제로 이 쟁점은 2012년 및 2018년 대법원 판결 모두에서 비중 있게 언급되었다. 간과하기 쉽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청구권협정 관련 조항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 및 그에 대한 평석 모두 청구권협정 관련 조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총 4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청구권협정 제2조 제1항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 년 9 월 8 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와 관련해 2012년 대법원 판결은 ①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 ② 일본 정부가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부인하는 이상 이것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③ 국가 대 국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국제법과 달리 근대 국제법에서는 국가가 나서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없다는 점 ④ 이번 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국이 상대방에 대하여 외교사절을 통해 자국민의 피해를 구제해 달라고 요청할 권리, 즉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자국민이 상대방 국가, 기업 등에 대하여 소송 등으로 권리 구제하는 것까지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소멸하지는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대법원의 입장은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 다수 의견으로 굳어졌고, 같은 입장의 김소영,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의 별개의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하여 권순일, 조재연 대법관은 ① 앞서 살펴본 청구권협정 제2조 제1항 상의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표현과 당시 같이 작성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 등의 문언, ②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1961. 5. 10.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일반청구권소위원회 제13차 회의에서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해결할 문제라고 발언한 점, ③ 1965. 7. 5. 청구권협정 체결 직후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조약 및 협정 해결’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 보상금, 한국인의 대일본 정부 및 일본국민에 대한 각종 청구 등은 모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라 기재한 점, ④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청구권자금법, 청구권신고법, 청구권보상법, 2007년 및 2010년 희생자지원법 등을 제정하여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한 점 등을 종합하면 청구권협정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도 소멸되거나 적어도 그 행사가 제한된다는 입장을 취하여 단순히 외교적 보호권만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더 나아가 국제법상 전후 배상문제 등과 관련하여 주권국가가 외국과 교섭을 하여 자국국민의 재산이나 이익에 관한 사항을 국가 간 조약을 통하여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이른바 ‘일괄처리협정(lump sum agreements)’은 국제분쟁의 해결 예방을 위한 국제관습법상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조약 형식이고 이 경우 국가가 상대국으로부터 보상이나 배상을 받았다면 그에 따라 자국민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는 것으로 처리되고 이 때 그 자금이 실제로 피해국민에 대한 보상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 국제사법재판소(ICJ)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2014년 발간된 서울대 법학교수 5인이 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사건 판결이 종합적 연구’ 내용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2.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사건 문제, 어떻게 출구전략을 마련할 것인가?

이번 판결 및 판결에 기초한 집행 문제와 관련하여 아쉬운 점은 법리적 논쟁이나 외교적 해결을 위한 건전하고 발전적인 논쟁은 사라지고 오직 진영 논리에 따른 친일, 반일 논란만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장기화될수록 한일 양국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지금은 잠시 뜨거운 가슴을 내려놓고 차가운 머리로 출구전략을 모색할 때다.

어쨌든 이 사건은 한일 양국 모두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최고재판소에서 서로 다른 결론이 내려진 만큼 일각에서 제기하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단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은 별론으로 당장 양 당사자국 간의 합의가 필요한 사안인데, 만약 한일 양국이 ICJ 제소에 극적으로 합의한다고 해도 현재로서는 우리 쪽이 패소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앞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 반대의견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지난 2012년 이와 유사한 사안인 이른바 페리니(Ferrini) 사건에서 양국 간에 강제노력에 대한 배상을 포함한 ‘일괄처리협정’이 체결된 이상 피해국 측이 가해국 측에 대하여 추가적인 배상청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 이 사건은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청구권 협정’은 이 같은 분쟁 가능성을 고려해 이미 1965년 체결 당시부터 이에 대한 해답을 암시하고 있다. 즉 ‘청구권 협정’ 제3조 제1항은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조 제2항은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은 어느 일방 체약국의 정부가 타방 체약국의 정부로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식문서를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 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 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 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국은 같은 협정 제4조에 따라 이 같이 구성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승복하여야 한다. 이로써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분쟁은 일소되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국경을 인접한 나라치고 서로 사이가 좋은 나라는 없다. 특히 상호 간에 얽힌 역사가 길면 길수록 거기에는 애증이 뒤섞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양국의 관계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극단적인 프레임에만 가두어 두기에는 부족하고 양국 간의 지나온 역사를 살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모색해야만 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비록 대법원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망정, 외교적 노력을 통해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까? 양국 정부의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과 대응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