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조, 68×59㎝

絵画는斷面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화이건 서양화이건 같다. 이러한斷面의 일을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영위해왔으며, 그것이 거듭되어온 부피를 우리는 미술의 역사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가 먼저 이러한 斷面의 일을 시작했는지 그 起源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인간에게 처음 그 生存理由를 부여한건 인간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술가들은 늘 미술의 起源에 대해서 묻는다. 왜 사람은 絵画를 영위해 왔는가라고….

동양의 絵画는 한장의 화선지위에 인간의 생명현상을 투영해온 멀고 아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잘 그리건 못 그리건 간에 모두가 이 斷面의 形式… 곧 게스탈트적이며 靜的인 知覺形態로 특징 지워지는 斷面 위에 時間과 空間의 체계와 균형을 투영해왔다.

宋秀璉은 이러한斷面의形式을 끈기있게 추구해온 작가이다. 지난 무엇을 표현하는가..의 문제보다도 바로 그斷面의 形式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생각되기를, 필경 그의(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종이회화 송수련,한지작가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 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의식 속에 흐르는 미술에 관한觀念이 모름지기 그 起源에서가 아니라 그 切斷面에서 판단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 장의 화선지를 경계로 해서 동양인은 자연과 만났으며 예술과도 만났다. 한 장의 화선지가 붉게 물드리우면 거기 黎明을 觀念했고, 어떤 징표도 물드리우는 게 없으면 漆黑을 諦念했다.

한 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하얗고 얇은 切斷面은 바로 동양인의 意識의 形式인 것이었다. 자연인 物理的세계와 인간인 精神的세계를 맺어주는 이 切斷面인 中性은 실로 동양인이 이룩한 놀라운發見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람에 띠워 物理空間속으로 날리면 궁극에 있어서 地表의 레벨로 가라앉는다는 걸 동양인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 斷面은 소중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다시地表로 환원되어 無機質로 되돌아가는 걸 한사코 꺼리어 피하려 했다.

△글=유준상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