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폭풍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일본이 4일부터 소재 분야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 가운데 두 나라의 정상적인 외교채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평가다.

여론전도 치열하게 전개되며 일본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나오는 한편 33명의 사망자를 낸 일본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뜬소문도 퍼지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계속될 경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재검토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두 나라의 관계를 두고 "폭주열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처럼 위험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결국 힘대결로
일본 경제산업성의 이와마쓰 준 무역관리과장은 19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4일 이후 수출허가 과정은 정당한 민수거래의 경우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이 사실을 오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규정 변경을 통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다고 발표한 바 있으나 현재 해당 물량은 정상적으로 통관 절차를 밟고있다. 이 지점을 두고 한국이 무리하게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비판인 셈이다.

다만 제재 지속에 대해서는 사실상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와마쓰 준 과장은 "신뢰관계가 없으면 한국과 대화할 수 없다"면서 수출규제에 대해서는 "운용의 재검토기에 협의할 성질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일본은 현재 3대 소재 수출을 두고 수출 규제 수준에 머물러있으나 조만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한편 제재 규모를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그 연장선에서 지난 12일 한일 첫 실무회의에서 나온 일본의 '협상은 없다'는 메시지는 계속 반복될 조짐이다.

국내 기업들은 비상상황이다. 당장 삼성전자는 컨틴전시 플랜을 실제로 가동하며 충격에 대비하고 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협력사들에 공문을 보내 일본산 소재 및 부품 비축분 90일치 이상을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협력사들이 재고 확보와 관련해 보관비 등 비용이 발생할경우 이를 삼성전자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나아가 물량이 예상처럼 소진되지 않아도 그 부담은 온전히 삼성전자가 책임지겠다는 뜻도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일본이 전격적인 금수조치까지 취하지는 않아도,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도 움직이고 있다. SK하이닉스 대외협력총괄 김동섭 사장은 일본의 원자재 협력사 방문을 위해 1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해 현지 거래선들과 접촉했다.

국내 기업들의 행보가 빨라지는 가운데 일부 지점에서 탈 일본 단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당장 LG디스플레이는 일본 불화수소 국산 대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일본이 아닌 중국 기업으로부터 불화수소를 수급받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아직 테스트 과정이며 상용화에 나서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의 제재 의지가 뚜럿한 상황에서 한국은 강경 대응을 이어갈 방침이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여야 5당 대표와 회동해 일본의 수출규제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제재를 보복으로 규정하는 한편 즉각 철회해야 한다는 공동 발표문까지 냈다. 문 대통령은 모두발언을 통해 “걱정되는 시기에 대통령이 여야 대표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은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18일 기준금리를 연 1.75%에서 1.50%로 낮춘 것도 일본의 수출규제가 경제 불확실성을 키운다는 우려에서 비롯됐다는 말이 나온다.

정부는 일본 수출규제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특별연장근로를 인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가 열린 가운데 정부는 제품 연구개발(R&D) 등에 필요한 화학물질의 인허가 기간을 줄이는 한편 신규 화학물질의 빠른 출시를 지원하고 해당 분야의 특별연장근로를 인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세엑공재까지 불사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일본의 추가제재 및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및 동북아시아 안보 협력을 위협하는 행위로 규정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재검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나왔다.

국내 일본제품 불매운동도 불이 붙었다. 유니클로 등 일본 제품에 대한 비토정서가 확산되는 한편 일본 여행객들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소개하며 "한국에서는 일본산 제품에 대해 무조건 불매를 선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있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19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강제징용 배상 판결 관련 중재위원회 구성에 응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담화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 자리에서 남 대사의 말을 자르고 "한국은 무례하다"는 말을 하는 등 외교적 결례를 서슴치 않았다.

일본의 경제제재가 한국의 정치권력을 흔드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도 현지에서 나왔다. 아사히 신문은 19일 일본 경제산업성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 일본의 경제제재가 문재인 정부를 정조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위 간부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 징용공 문제에 대한 한국 쪽 대응은 지독한 행위"라면서 "문재인 정권이 계속되는 이상 규제를 계속할 수 밖에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앞서 후지TV의 히라이 후미오(平井文夫) 논설위원은 유튜브 채널에서 "한국은 내놓을 것이 없다"면서 "문 대통령을 자르는 것(탄핵) 정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3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교토 애니메이션 발화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유언비어도 번지고 있다. 현지 네티즌 일부는 "방화는 한국인의 습성"이라는 말을 공유하며 반한감정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일각에서는 1923년 9월 일본 간토·시즈오카(靜罔)·야마나시(山梨) 지방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 일본인을 죽이려 한다는 선동이 횡행했던 장면을 언급하며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변수가 될까?
일본의 제재가 계속될 경우 한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한국은행은 18일 2019년 하반기 경제 전망을 통해 일본 제재가 장기화될 경우 "국내 관련 산업의 회복 가능성에 부정적"이라면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의 반도체 관련 대일본 수입 비중은 반도체 소재가 약 75% 정도를 차지하며 반도체 제조용 장비 수입 비중도 25%를 넘기 때문이다.

비단 한국 경제 파급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카트리나 엘 무디스 애널리틱스 이코노미스트는 "한국과 일본 간 분쟁이 몇 달 동안 지속한다면, 전 세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일본의 제재가 이어질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술기업 신용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만약 일본이 (한국에 대한 소재)수출을 중단하면 그 고통은 전 세계 기술 공급망으로 파급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WSJ도 "자유무역의 챔피언인 일본이 트럼프의 각본을 따라하고 있다"며 "일본이 기술 수출을 외교적 분쟁의 무기(weapon)로 사용하면 상호 연결된 세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일 경제전쟁이 심각한 상황으로 흐르는 가운데 미국의 역할론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일단 미국은 표면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다만 일본의 경제제재를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로 아베 내각의 참의원 선거 압승을 끌어낼 경우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군대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되며, 이는 일본에 무기를 판매하고 싶은 미국에게 커다란 이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이 적절한 수준까지 한국의 반도체 인프라를 압박해주면 마이크론 등 자국 기업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도 나온다.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등에게 반도체를 제대로 수급받지 못하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타격을 피할 수 없으나, 내년 대선 정국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현 상황에서 미국이 한일 경제전쟁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정중동 행보를 보이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미중 무역전쟁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지난해 초부터 상대국에 관세폭탄을 던지며 전쟁을 벌였으나 최근 G20을 기점으로 휴전에 돌입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두 나라는 휴전이 무색할 정도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블룸버그 등 외신은 1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갈 길이 멀다"면서 "중국과 대화하고 있으나 거래가 깨지지 않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미국산 농산품 대량 수입을 약속했으나 실제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현재 시 주석은 미국의 중국 화웨이에 대한 완전한 제재 완화가 먼저 이뤄져야 실질적인 거래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 3250억달러에 대한 추가 관세 카드를 만지작 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분위기도 심상치않다.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국이 중국에 총 22개 품목에 반덤핑, 반보조금 상계관세를 부과한 가운데 중국이 이를 WTO 상계관세 분쟁으로 끌고갔고, WTO가 중국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미국은 강력하게 반발한 바 있다. 여기에 대만 문제까지 겹치며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두 나라의 협상채널도 소극적이다. 미중 장관급 무역협상 대표들이 전화로만 협의하는 선에서 탐색전을 펼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휴전에 문제가 생겨 두 나라가 다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그 여파가 한일 경제전쟁에도 큰 충격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두 나라가 각자의 우군을 강하게 원하며 진영싸움을 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당장 존 볼턴 미국 국가안전보장위원회 보좌관이 조만간 한국과 일본을 찾는다는 소식이 알려진 가운데, 미국의 실질적인 역할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