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위험수준에 이르렀다. 일본이 수출관리 규정 변경을 통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다고 발표한 가운데, 최근에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한편 추가 제재 가능성까지 열어놨다. 이번 제재가 참의원 선거라는 내부 이벤트의 상승동력이 아니라 치밀하게 오랫동안 준비된 '작전'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이다.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지금. 역사의 시계를 돌려 대한제국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을 침탈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고종 황제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특사로 파견한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세계의 평화를 논하는 자리며, 고종 황제는 여기에 희망을 걸고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성토해 일종의 여론전을 노렸던 셈이다.

그러나 상황은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의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일제는 집요하게 대한제국 특사들의 회의장 입장을 방해했고 결국 특사들은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특사들은 현지 언론을 통해 일제의 부당함을 알렸고, 이준 열사는 당시 머물던 드용 호텔에서 순국했다. 1907년 7월 13일의 일이다.

당시 은밀하게 파견된 대한제국의 특사들은 왜 뜻을 이루지 못했을까? 저열한 일본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본질적으로 비정한 국제관계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시대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그 아름다운 이름처럼 세계의 평화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힘을 가진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기들이 확보한 식민지를 '어떻게 요리하고 나눌까'를 논하던 자리에 불과했다. 늑대들의 회의였던 셈이다. 결국 국제관계는 힘이 순수한 의지며, 국제정치의 최고단계에는 비정한 정글의 법칙만 통용된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2019년 7월 13일. 이준 열사가 쓰러지는 조국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목숨을 역사의 제단에 바친지 112년이 된 현재, 한국은 다시 일본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 시절 스스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부유물에 몸을 맡겼고, 이념전쟁의 산물인 남북관계를 흔들며 저열함을 보이고 있다. 112년전이나 지금이나 "대일본제국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의식은 기시 노부스케에서 아베 총리에까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흔드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한국은 달라졌다. 빠른 산업화 과정을 거쳐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로 발전했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이자 자동차 강국이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무능한 개혁군주에 불과했으나 지금의 한국은 더이상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순수하게 망상하던 나라가 아니다. 노련해졌고, 강해졌다.

112년전에 갇혀 한국을 보는 일본과, 더이상 맥없이 무너지지 않는 한국의 경제전쟁이 벌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비극을 더더욱 재연할 수 없다. 자국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는 임진전쟁의 연장선에서 여전히 장난을 거듭하는 일본의 도발에 듬직한 기초체력으로 버티는 한편, 냉정하고 유연한 전략을 진짜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대체할 수 있는 실력도 지금이라도 키워야 한다.

그 이면에는 냉정한 국제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이 깔려있어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 나라를 빼앗길까 걱정하지 않고, 허울뿐인 평화회의에 모든 기대를 걸며 발만 동동 구르지 않는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도발을 분쇄하고 우리의 길을 찾아야 한다. 국제정치는 힘있는 자의 무대며, 이제 힘은 제국주의시절의 총폭탄이 아니라 경제력에서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해 현재 한국이 '잘하고 있느냐'는 물음을 두고 합격점을 주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비관하며 낙제점을 줄 일도 없다.

조만간 WTO 일반이사회가 열린다고 한다. 대한제국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나, 지금의 한국 정부는 당당하게 공식안건을 채택시켰다. 한국 정부는 이 자리에서 일본의 제재를 규탄하는 한편 본격적인 여론전에 돌입한다는 각오다. 생각해보면 WTO 일반이사회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힘의 무대'일 뿐이지만 이제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차례다. 저열할 필요도 없고 흥분할 필요도 없이 정공법대로 풀어가며 우리 스스로가 국제정치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자세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