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공영방송 NHK의 인기 프로그램 '아빠와 함께(おとうさんといっしょ)' 출처= NHK 홈페이지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1인 가구가 소비와 서비스 업계의 많은 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머지않은 시기에는 ‘육아빠(아이를 키우는 아빠)’들이 새로운 시대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우리나라의 소비 트렌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일본의 시장에서 최근 나타나는 변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14일 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일본에서는 저출산이라는 상황에 대응해 아빠들의 육아를 적극 권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소비·유통업계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보수적 성 역할’ 대명사 일본이 변한다 

일본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가장 보수적으로 구분하는 국가다. 강민정 KOTRA 일본 도쿄무역관이 작성한 <존재감 커지는 일본 아빠, 육아시장 新소비 공략> 보고서 에서 밝힌 일본 내각부 통계 조사에 따르면 일본 기혼남성들의 평균 육아·가사 시간은 약 1시간23분으로 같은 조건에서 7시간34분인 여성들보다 훨씬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일본 총무성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일하는 일본 여성의 수면 시간은 일본 남성에 비해 평균 19분에서 20분이 짧아 조사대상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성 역할의 고정성이 견고했던 일본이 연평균 출산율 1.42(2018년 기준)라는 초저출산으로 인해 일본의 내수경제를 뒷받침하는 인구 감소라는 위험요소를 마주하면서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 일본 남성들과 여성들의 평균 가사 육아시간 비교. 출처= KOTRA <존재감 커지는 일본 아빠, 육아시장 新소비 공략> 보고서

생산가능 인구와 경제활동 인구가 지속 감소하고 있는 변화에 일본 정부는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와 동시에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남성들의 가사와 육아 참여를 정책적으로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각 기업들에게 금요일에는 오후 3시에 직원들을 퇴근시키는 ‘슈퍼 프라이데이’의 실천과 남성 육아휴직 제도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17년 일본 남성들의 육아휴직율은 5.14%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여기에 방송계는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하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비추는 프로그램들을 내보내는가 하면 육아하는 아빠들이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잡지들이 나오기도 했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2013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프로그램 ‘아빠와 함께(おとうさんといっしょ)’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본 남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장수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에 일본에서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성들을 멋진 사람으로 추켜세우는 말로 육아를 뜻의 한자 '이쿠(育)'와 남성(혹은 사람)을 의미하는 '멘(メン)'의 합성어인 '이쿠멘(育メン)'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유통·IT업계도 변하고 있다 

일본의 유통업계도 육아를 하는 아빠들을 위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등으로 일련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일본의 대형 백화점 브랜드 한큐한신(阪急阪神) 백화점 효고현 지점 니시노미야한큐에는 최근 남성의 활동패턴에 맞춘 육아용품들을 판매하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giacca blu’가 열렸다. 이곳의 콘셉트는 ‘육아하는 멋진 아빠’로 남성 의류와 더불어 디자인과 실용성을 겸비한 남성용 앞치마, 남성용 육아가방 그리고 유모차 등 남성용 가사 육아용품을 취급한다.  

니시노미야한큐의 점장은 “지금의 30~40대 일본 남성들은 집안일을 하고 휴일은 가족여행 등 가정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면서 “앞으로 일본의 유통업계에는 남성들의 육아 참여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을 위한 제품이나 서비스들을 강화할 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 니시노미야한큐 ‘giacca blu’ 매장. 출처= KOTRA

그런가하면 최근 일본에서는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인공지능이 아기의 수유주기나 배변 주기를 체크해주는 베이비테크(BabyTech) 기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육아하는 아빠들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업체인 파파스마일(Papasmile)은 지난해 일본최초의 육아 전문 웹 정보 플랫폼을 만들었다. 지난 2018년에는 일본의 IT 스타트업 5개 업체가 뜻을 모아 ‘육아Tech위원회(育児テク委員会)’가 발족됐다. 이 조직의 목표는 육아기록 공유, 육아정보 수집 그리고 육아 관련 부부 간 의사소통 확대를 기술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해당 기술의 발전 상황과 시장 연구보고서를 2개월에 1번씩 낼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변화 조짐 

출산율 저하라는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 심각하다. 통계청 인구동향조사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가임여성의 출산율은 일본보다 낮은 1.05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내수가 충분하게 경제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게 이는 장기 관점에서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 출처= 통계청

이에 따라 국내 대기업들도 일본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남성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거나 확대하는 등의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국내 재계순위 5위의 롯데그룹은 ‘기업문화위원회’를 발족하고 국내 대기업 최초로 남성 임직원들의 육아휴직을 의무화했다. CJ그룹은 유급 3일 무급 2일로 실시했던 남성 출산휴가 제도를 유급 14일로 바꿨고 SK는 성별에 관계없이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 1년을 연달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삼성은 법로 정해진 육아휴직 1년 이외에 남성 임직원이 자기계발휴가를 사용할 수 있어 최대 2년까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 LG전자도 성별에 관계없이 법정 육아휴직 기간인 1년을 휴직 기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일련의 변화들은 일본과 궤를 같이하고 있어 곧 우리나라의 소비에서도 육아하는 아빠들의 선택이 중요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59세의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남성(아빠) 육아에 대한 인식’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87.7%는 ‘남성들의 적극적 육아 참여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활동’이라는 데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육아는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부담’이기 때문에 남성의 육아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30대 가장 많이 공감(84.9%)했다. 

▲ 출처=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유통업계 한 전문가는 “저출산·고령화라는 변화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어떤 면에서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우리나라에게 여러모로 시사하는 것이 있다”면서 “과거 일본의 1인 가구 증가가 사회에 미친 변화들이 우리나라에도 고스란히 재현된 것처럼 남성 육아에 대한 의식 또 그를 대하는 소비재 업계의 대응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