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7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1987>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 실화에 근거해 자기의 모든 것을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 호평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우리 주변에 있을법한 소시민 영웅'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희준 배우가 연기한 윤삼삼 기자의 취재입니다. 정부가 대학생 고문살인을 은폐하려는 정황을 포착하고 끈질기고 기만한 취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데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점을 찍는 대목이 배우 하정우가 연기한 '공안부장 최부장'과의 만남입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향하던 최부장이 결국 한계를 느끼고 퇴장하는 가운데, 윤 기자는 그를 찾아가 진실을 말하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최부장은 겉으로 차가운 조소를 보내면서 윤 기자에게 결정적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받아쓰기나 잘 해"

"받아쓰기나 잘 해"라는 말은 이 영화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윤 기자의 선배 기자들이 가끔 말하는 '받아쓰기'는 신군부의 서슬에 눌려 정부가 불러주는 대로만 쓰는 기자의 한계를 토로하지만, 최부장의 말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기자에게 수동적인 역할만 강요하는것 같으면서 '받아쓰기'에도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왜 받아쓰기 이야기냐고요? 1987년 기자의 받아쓰기는 2019년 대한민국에도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콘텐츠 제작자인 기자의 역할은 많은 변신을 강요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기자는 국민을 대신해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받아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하고 '받아쓰기 하며' 기록하는 것은 기자의 존재가치입니다.

▲ 영화 1987에서 진실이 알려지는 장면. 출처=갈무리

문제는 2019년 현재. 일부에서 용기있는 받아쓰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온라인 매체의 범람으로 자극적인 기사, 시선을 끄려는 기사만 받아쓰기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SNS 등의 발전으로 더욱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정치인과 유명인들이 모두 SNS를 사용하며 기자들은 이를 열심히, 아무 생각없이 받아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소비되며 현안을 왜곡하고 증폭시키는 장면은 심각한 폐혜입니다. 이제 정치인의 말 한마디를 들으려 현장을 누비며 애를 태울 필요가 없이, 정치인의 SNS만 열심히 모니터링하면 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진의는 왜곡되고 진실은 길을 잃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본적인 취재가 수반되지 않는, 소위 경마형 받아쓰기 기사가 범람하는 대목입니다. 차라리 정치인이나 공적 인사에 가까운 인물의 글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일반인이 올린 글을 아무런 생각없이 긁어 받아쓰기하며 진의를 왜곡하고, 문제가 되면 "이러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말하며 면피하는 기자들의 방식은 이제 전가의 보도처럼 됐습니다. 이걸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차라리 받아쓰기를 할거면, 그 지점에 착안해 이를 취재의 시작으로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디어 커머스의 뜨거운 논란, 임블리 사태를 취재하며 들었던 생각을 공유할까 합니다. 임블리에 명확한 분쟁의 소지가 있고, 책임도 있습니다. 다만 이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확인이 전제되지 않은 보도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언론은 임블리 안티계정에 올라오는 확인되지 않은 글과 사례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기사화하고 분노를 패스트푸드처럼 진열하기에만 바쁩니다. 진실을 확인해야 하는 기자들이 '확인되지 않은' 안티계정의 글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안티계정은 빙그레 웃으며 기자들에게 일용할 양식만 던져줍니다. 이 과정에서 진짜는 사라지고 언론은 '이런 글이 안티계정에 올라왔다'는 프레임 뒤에 숨어 버립니다. 시민단체가 임블리를 고발했다는 것만 기계적으로 보도하고, 해당 시민단체가 임블리에 고소 취하 조건으로 또 다른 '딜'을 조용히 제안한 것은 찾아보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모든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만 인터넷의 발전으로 기자들의 받아쓰기가 매우 일반화된 상태에서, 이제는 용기있는 받아쓰기가 필요할 때가 아닐까요?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거창한 용기가 아니라 하나라도 더 찾아보려는 용기, 하나라도 더 확인하려는 용기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의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부라고 해도, 이 역시 전체의 용기로 확장되어 보여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뭘까요? 받아쓰기라도 잘 하면 됩니다. 이렇게만 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요? 빠른 파급력과 정신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호수에 갇혀 나름의 회한에 잠겨있을, 일부에 대한 조심스러운 제안입니다.

*IT여담은 취재 도중 알게되는 소소한 내용을 편안하게 공유하는 곳입니다. 당장의 기사성보다 주변부, 나름의 의미가 있는 지점에서 독자와 함께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