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영화 ‘기생충’의 영향력이 확실히 크긴 큰 것 같다. 영화의 내용이 아니 영화에 대한 평론가의 한줄 평이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가 됐으니 말이다.

시작은 사소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기생충을 관람하고 지난 1일 개인 블로그에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아마 이동진 평론가는 자신이 남긴 짧은 감상평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인터넷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갑론을박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니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한줄 평을 남길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소한 한자어들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이 평론가의 표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과 그와는 반대로 “영화에 대해 느낀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평론가의 언어 선택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라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었다. 

같은 현상을 마주하는 다른 시각이라는 점에서 이번 이 논란은 어떤 의견이 옳거나 그르다거나 어느 한쪽의 논리가 더 합당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양쪽의 의견 모두 일 리가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동진 평론가가 본래 조선일보의 기자였다는 점을 고려하자. 그의 한줄 평은 언론사가 기자들에게 강조하는 기사의 언어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기사의 암묵적 원칙 중 하나는 ‘중학교 2학년(대략 15세) 청소년이 보고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수많은 연령대의 대중을 상대해야하는 신문(혹은 잡지)이라는 매스미디어의 특성을 고려해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어떠한 사실에 대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적 전달법을 추구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이런 관점이라면 이 평론가의 한줄 평은 메시지의 전달 방법이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동진 평론가는 기자의 입장에서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스미디어에 기사를 올린 것이 아니다. 그는 적어도 십 수년 이상 수많은 영화를 연구해 온 전문 평론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평을 올렸다. 여기에서 굳이 이 평론가가 언론이 강조하는 언어를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기사를 쓰는 기자든, 소설을 쓰는 작가든 혹은 SNS에 짧은 글을 남기는 사람이든, 글을 쓰는 이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한다. 

이 평론가는 영화 기생충에 대해 자신이 든 생각이나 느낌을 자신이 선택한 언어가 아니면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이 감상평의 내용을 한 번에 이해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는가의 문제를 평론가가 반드시 배려해야할 이유는 없다. 철저하게 영화 전문가의 언어선택일 뿐이다. 또 그가 선택한 명징(明澄: 또렷하고 분명함)이나 직조(織造: 기계나 베틀로 피륙을 짜는 일) 등 한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뜻을 이해하고 나면 그렇게 어려운 표현을 쓴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기에는 조금 긴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내용을 짧은 한자어를 사용해 간결하게 표현한 것은 한자어 우리말 활용에 대한 글쓴이의 깊은 이해도를 짐작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라면 이 정도의 용어 선택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좀 더 터놓고 말해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외래어를 쓴 것도 아니고, 한자어 우리말을 쓴 평론가의 언어선택이 과연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몰랐다면 알고 나서 그만큼 지적 수준이 늘어났음을 기뻐하면 그만일 일이다. 이를 애써 깎아내리려는 의견들에는 그렇게 생각할 만 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분야에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이자 언론인의 모습을 보여준 이동진 평론가는 많은 후배들의 롤 모델이다. 그에 대한 다른 평가를 다 떠나 특정영역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가 쏟아 부은 노력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가장 매력적으로 전달하는 표현법은 분명 많은 후배 언론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기자는 이번의 작은 논란으로 언론계 대선배의 절묘한 언어 선택에 무릎을 탁 치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물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