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 수학철학, 심리철학, 언어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기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추앙 받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연구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하나의 철학적 논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 경우가 많은 여타 철학자들과 달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그는 전기 철학에서 세계와 언어가 1대 1로 대응한다는 ‘그림 이론’을 주장했지만, 후기 철학에서는 이 주장을 뒤집고 언어와 세계가 다양한 양태로 대응한다는 ‘가족유사성 이론’을 주장했다. 가령 우리가 ‘게임’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스타크래프트나 오버워치, LOL 같은 하나의 대상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게임은 물론 콘솔 게임, 스마트폰 게임, 심지어는 보드게임이나 가위바위보, 땅따먹기 등의 각종 놀이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바꾼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함께 재직 중이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의 토론 때문이었다고 알려진다. 스라파는 비트겐슈타인과 전기 철학의 그림 이론에 대해 토론하던 도중 반론과 함께 손가락 끝으로 목 부분을 밀어 올리는 행동을 취했다. 이는 그들이 있던 영국에서는 별 의미 없이 사용되는 제스처였지만, 스라파가 온 이탈리아에서만큼은 달랐다. 바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행동이었던 것. 이를 본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전기 철학에서 주장했던 것과 달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가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한다. 언어의 이론적 쓰임에 집중한 전기 이론과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보다 중요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언어란 뜻이 아닌 ‘사용’에 본질이 있으며,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는 ‘가족 유사성’ 이론을 만들고 발전시켜 나간다.

내가 뜬금 없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을 떠올리게 된 건 최은영 작가의 책 <쇼코의 미소> 속 ‘한지와 영주’라는 작품을 본 뒤부터이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영주는 프랑스의 어느 수도원에서 오랜 기간 자원봉사자로 일한다. 일주일만 머물기로 예정되었던 그곳에서 일곱 달을 보내며 그녀는 다양한 일을 경험한다. 수도원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아야 했고, 대학원을 휴학해야 했으며, 언니와 대학원 동료들에게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삼 년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시기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은 케냐 출신의 수의사 한지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같은 신분(자원봉사자)으로 만나 석 달을 함께 보낸다. 영주는 한지의 따뜻함에 깊이 공감한다. 아픈 몸으로 태어나 평생을 누워 지내야 하는 동생 레아를 돌보는 이야기나, 어미 잃은 코뿔소를 자신의 손으로 돌본 뒤 야생으로 돌려보내던 순간의 아픈 감정 등에 대해 말이다.

영주는 ‘한지를 알아 온 지 삼 년이 넘었지만 한지가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건 처음 봤어’라거나 ‘(한지는) 모두와 잘 지내지만 절대 속을 알 수 없지’라는 등의 이야기를 함께 온 그의 지인에게 듣긴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타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공감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은 결국 둘 사이의, 두 사람만 아는 일이이므로.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두 사람의 사이는 물리적 이별을 앞두고 급격하게 멀어진다. 마치 한 번도 마음을 나눈 적 없는 것처럼 말이다. ‘너희가 끝까지 화해하지 못한 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해’라거나 ‘네가 왜 한지에게 그렇게 대하는지 모르겠어. 한지는 좋은 애야’ 같은 동료의 이야기 역시 그저 타인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적어도, 영주는 한지가 자신을 왜 피하는지, 왜 하루아침에 생판 모르는 남처럼 자신을 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이가 급격히 멀어진 이유에 대해 ‘한국과 케냐 사이의 거리가 만들어낸 현실적인 문제 때문(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_서영채)’이라고 믿는 듯하다. 물론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 그 헤어짐의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므로, 소설이란 장르란 결국 그 여백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 가는 장르이므로 다른 상상을 조금만 더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그러니까, 이런 가정을 해보자는 얘기다. 한지는 영주와 멀어진 날의 대화 도중 그런 경험을 한 거다. 한국에서는 별 뜻 없는 제스처이지만 케냐인들에게는 심한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을 만한 그런 행동을 영주에게서 발견한 거란 얘기.

그렇다면 한지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이렇게 서술될 수 있을 거다. ‘한지는 영주에게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의도한 것도, 그런 뜻에서 행동한 것도 아님을 알았지만 말이다. 그 순간 한지는 느꼈다. 이 인연은 결국 여기까지라고. 수도원을 벗어나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벌어지게 되면 두 사람의 마음의 거리 또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될 거라고. 차라리 그 전에 그녀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도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와 행동은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될 수 없다. 한지와 영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화권을 공유하지 않은 두 사람은 결국 다른 일상의 대화, 오해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만들고 말았다.’

다시 반복해 이야기하지만 소설 속에는 한지가 왜 그녀(영주)에게 갑작스레 차가운 태도를 취하는지 어디에도 그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다. 서로 오해를 겪고 말았다는 이야기 역시 그저 나의  상상에 불과할 뿐, 소설에는 그저 밀어내는 한지와 그 이유가 알고 싶은 영주의 안타까움이 존재할 뿐이다. 아마도, 아니 어쩌면 이런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 작가는 이런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이란 결국 남겨진 여백을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더해짐 혹은 덜어짐이 가능하도록 빚어진 장르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