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이 어렵고도 해묵은 질문에 사람들은 차츰 더 '아니오'에 가까운 대답을 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통계청이 지난 2015년에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무종교인은 전체 인구의 56.1%로 43.9%인 종교인구보다 약 13% 많게 나타났다. 지난 1985년 첫 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종교가 없는 사람이 인구의 과반을 넘은 것은 처음 생긴 일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 내 무종교성을 연구하는 필 주커먼의 책 <종교 없는 삶>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인들 가운데 종교가 없는 사람은 채 5%도 되지 않았'지만 '2013년에는 19%로 급등했으며, 국가적 차원의 최신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에는 30%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18세에서 29세 사이의 미국인 가운데 1/3이 종교를 갖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즉, '종교 없음이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적 태도가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신을 믿을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 다음과 같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길 강요받는다. 하나,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으나 신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유신론). 둘,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무신론). 셋,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두고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불가지론).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 개인의 몫이겠으나, 세 선택지 모두 그 전제 자체는 동일해 보인다. 즉, '우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

2010년대 최고의 SF작가로 손꼽히는 테드 창의 단편 '지옥은 신의 부재'는 이런 오래된 가정을 정면으로 부정함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시 말해, 신의 존재가 가정 혹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객관적 사실이며, 심지어는 현실 세계에서 천사의 강림을 체험하거나 지상과 별 다를 것 없이 보이는 지옥의 모습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기본 전제다.

만약 세상이 이렇다면(신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한 세상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신이 있는 것이 확실하니, 천국에 가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는 '착한 삶을 살겠다' 혹은 '신을 충실히 믿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겠는가? 아니면 지옥에 가도 지금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이니 그저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소설의 주인공 닐은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방황하는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닐은 평소 신을 믿지 않고 살다가 사후에는 지옥에 가리라 믿어왔다. 하지만 어느 날 천사의 강림으로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천국으로 보낸 닐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냥 원래 생각대로 지옥으로 가서 아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신을 믿고 천국으로 가서 아내를 만날 것인가.

문제는 신의 존재가 자명한 이 세상에서도 신을 온 마음 다 바쳐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하물며 네가 좋다고 몇 날 며칠 매달려도 상대방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말까하는 세상인데, 얼굴은 생전 한 번 비추지도 않고 가끔 아랫것(천사 말이다)이나 내려보내 제 힘 자랑이나 하는 존재를 어찌 아무런 의심이나 불만 없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신을 사랑할 방법을 고민하던 닐은 묘책을 하나 생각해낸다. 바로 천사가 강림할 때 나타나는 천국의 빛을 보겠다는 것이다. 성지로 향한 닐은 오랜 기다림과 노력 끝에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 번개를 맞고 신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 어떤 연유에선지 닐만큼은 그 깨달음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말 그대로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철학사에 있어서도 신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랜 기간 이어져왔다. 중세의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섯 가지 증명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하였으며,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데카르트 역시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완전한 신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는 것 자체가 신이 존재함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뿐이랴, 누군가는 신의 존재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우주만물을 만든 창조주에게 오직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신은 죽었다'며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서구 문명, 이성 중시 풍조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쩌면 신을 긍정하고, 부정하며, 다시 긍정, 또 다시 부정하는 역사가 서양 문명의 역사이자 철학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 그것이 중요한가? 어쩌면 우리에게 이 질문은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세상이 닐이 살아가는 곳과 같은 세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