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비 오는 밤에 집에 들어가는 길였습니다.

둘이 교행하기 딱 알맞은 아파트 내 인도라서 습관적으로 오른쪽으로 붙어

걷고 있었습니다. 마주 오는 아주머니가 우산을 푹 내려쓴 채 내 앞으로 돌진해 오는 겁니다.

잠시 망설이다 내가 왼쪽으로 피해 부딪치는 상황을 모면했습니다.

바쁜(?) 그녀에게 우측통행 원칙은 별무 소용.

이런 경우 일견 선택을 가볍게 하게 됩니다.

빌 브라이슨이라는 재기 발랄한 작가가 쓴 미국 애팔라치아 트레일 여행기를

최근 킥킥거리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애팔라치아 트레일은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14개주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트레일 길로서

무려 3,520 키로에 달합니다.

이 작가는 단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나는 여행 이야기를 써서

재미있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트레일 길에 위험한 곰이 있다는 걸 표현할 때 이런 식입니다.

그들이 걸은 스모키 산맥에 사백에서 육백 마리의 곰이 있는데, 그들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또 ’이곳의 곰들은 사람하면 음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트레일의 전 코스를 종주하기로 계획했다가 너무 힘들어 일부를 건너뛰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에 의기양양하게 출발해서 얼마동안 악전고투하며 걷다가 트레일 길 인근의 상가에 걸려있던 트레일 전도를 보게 됩니다. 가로 15센티, 길이 120센티의 직사각형 모양에

트레일 전도를 그려놓았는데, 그때까지 그들이 정말 힘들게 걸어온 길이

고작 밑바닥 5센티에 불과한 것을 보고 실성할 정도로 경악!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머리카락도 그보다 더 자랐는데..’

그들은 경악하는 한편으로 고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종주할지, 말지?

그러다 종주에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합니다.

힘든 구간은 차로 이동해 건너뛰고, 다음 목적지로 가는 유쾌하고, 대담한 선택을 합니다.

결국 최종 목적지인 메인 주까지는 갔지만,

그들은 3,520키로의 전체 트레일 길 중에 40프로 정도인 1,400키로만 걷게 됩니다.

‘모든 노력과 땀, 구역질나는 지저분함, 터벅 터벅 걸었던 끝없는 나날들, 딱딱한 바닥에서

보낸 밤들...‘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을까요?

사실 1,400키로도 대단한 거리입니다.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이

1,400키로라 하니 가늠이 되시지요? 그러나 작가는 마무리하고도 종주가 아닌 것에

아쉬워하지만, 그래도 이내 애팔라치아 트레일 길을 걸은 것에 만족해합니다.

몸도 강해졌고, 산림과 자연, 숲의 온화한 힘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종주기가 아니더라도 그의 도전은 내게 재미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가벼운 선택도 의미 있어

보였습니다. 매사 진지한 나에게 한방을 먹인 것 같았습니다.

5월의 날씨만큼 가볍고 싶습니다.

우리가 숱하게 맞게 되는 선택도 이런 가벼운 선택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