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한 건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절친한 동네형의 아버지이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분이었다. 아저씨가 병석에 계신 동안에는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한참 뒤 폐경화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폐가 서서히 굳어가는 병인데, 발견 당시에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상태였다는 간략한 설명과 함께.

병원에 찾아갈 때마다 워낙 밝은 웃음을 보여주셨던 탓에 병상에 계실 때에도, 장례식장에서도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지 싶다. 왠지 당장 내일이라도 집에 놀러가면 아저씨가 가스불 앞에서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맛있는 떡볶이를 휘휘 저어 만들고 계실 것만 같아서.

아저씨의 죽음을 실감한 건 49재 때였다. 작은 숲을 지나면 보이는 작고 고즈넉한 절, 가볍고 조금은 경쾌하다면 경쾌한 목탁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절 한 켠에 놓인 아저씨의 사진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는 이제 다시는 아저씨를 만날 수 없구나.’ 그 순간부터 세상 떠나갈 듯 펑펑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사진 앞에 주저 앉아 안 된다고, 돌아오라고 소리치고 마구 악다구니를 썼다. 꾹꾹 울음을 찾던 아주머니도, 형도 나를 부둥켜 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그 뒤부터 나는 한동안, 아니 꽤 오랫동안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프게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닌 일에 많이도 울었다. 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떠나는 친구를 떠나보내며 펑펑 울었고, 내 잘못으로 인해 빚어진 이별에도 되려 더 크게 울었다. 나와 별 일면식이 없는 사람의 죽음에도 뚝뚝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내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철학사에 있어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 다음을 무(無) 혹은 새로운 시작쯤으로 여겼다고 알려진다. 당당한, 아니 일반인의 관점에선 조금 멍청하게 느껴지는 변론 끝에 제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둘 중 하나로 해석했다.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혼의 다른 곳으로의 이주’라고 말이다. 죽음이 만약 아무것도 아니라면 고통스러울 일이 없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으며, 다른 곳으로 혼이 옮겨가는 것이라면 이전 시대의 훌륭한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무엇도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 사조인 에피쿠로스 학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세상이 정신이 아닌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이런 관점을 우리는 ‘유물론’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죽음이란 과정 역시 단지 모여 있던 물질이 흩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동시대의 철학 집단인 스토아 학파는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알려진다. 이들 역시 죽음이라는 것이 단절 혹은 영원한 이별이라기보다는 어차피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이자 받아들여야 할 순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처음으로 누군가와의 이별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은 건 고작 몇 년 전의 일이다.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떠나는 날이었다. 관을 든 손에 땀이 가득 찰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어머니를 간호하며 단단해진, 아니 단단해져야만 했던 친구는 굵은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면서도 끝끝내 동생의 손을 잡은 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각각의 이별에는 각각 다른 예의가 필요함을, 그 이별의 방식을 존중해야 함을 느꼈던 순간이다.

나는 그 뒤에도 누군가의 죽음 앞에 의연하지 못하다. 때로는 눈물이 나고, 때로는 어색함에 허튼 소리를 마구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혹은 동시대의 철학자들이 보면 나를 바보 같다며 비웃을 게다. 하지만 누군가와의 이별을 조금이나마 더 아프고 슬프게 느껴야 할 사람도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게 내 이별의 방식이고,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이다. 나에게 죽음이란 결코 다른 세계로의 이주도, 아무런 고통이 없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