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욱 영화평론가
現 한류전문잡지 리웍스(Re:WORKS) 서울사무소 편집장
前 한사모(한옥을 사랑하는 모임) 사무국장-한옥보존운동 및 한옥알리기 운동
前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

1983년 봄, 한성 밖 보문동 언덕 위의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운동장 동쪽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를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다름아닌 넘실대는 한옥 기와의 물결이었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서 신설동에 이르는 넓은 공간에 가득한 한옥집과 그 집들이 머리에 이고 있는 각양각색의 지붕들, 그리고 그 지붕에 얹어있는 기와들이 내 눈 앞에 마치 요술처럼 펼쳐지는듯 했다.

따스한 봄볕에 때늦게 내렸던 눈들이 녹아 반짝이던 모습은 집과 집 사이에 씨줄과 낱줄처럼 얽힌 모습으로 나열된 지붕과 기와들이 마치 거대한 바다 위를 넘실대는 파도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한옥집과 기와의 지평선을 보았던 것인지 모른다.

요사이 서울 시내에서는 한옥을 찾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 또는 지인들과 함께 서울 근교로 가까운 나들이를 가 쉴 곳을 찾다보면 한옥으로 지어진 펜션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편안함을 찾을 때 한옥으로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창호지로 마감된 큰 창은 무더운 여름날이거나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에 스스로 습도를 조절해주는 기막힌 장치로 변신한다. 높은 대청마루의 천장과 낮은 방안의 천장은 그 높이를 달리하며 사람이 서있거나 앉아 있을 때 머리 위로 기운의 흐름이 원활히 하도록 설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방에 누워있는 주인의 모습이 창 밖 외부인에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도 일찍이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사생활을 보호해왔었는지 그 깊은 뜻에 감탄해 마지않게 한다.

집을 감싸고 있는 담장은 집을 짓고 남은 돌덩어리, 기왓장을 이용해 아름다운 꽃담으로 만들어 놓았고, 사계절이 또렷한 우리네 자연 환경에 따라 마당에 심어놓은 갖가지 꽃들은 한민족의 아름다운 심성을 길러내는데 적합한 풍광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요즘은 해충이라 멀리할 수도 있지만 온갖 곤충과 새들이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그야말로 상생의 공간이 바로 한옥집이다.

2008년 12월, 수년간 살았던 북촌 한옥마을을 떠나 북한산자락 정릉골 청수장 계곡으로 이사를 갔다. 북촌의 수많은 한옥이 서울시의 한옥보존정책과 사람들 사이에 불어온 웰빙 바람을 타고 인기를 얻어 보수되고 지켜지기도 했지만, 한 편에서는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생활공간이던 한옥은 카페와 각종 음식점으로 변했다. 게다가 늦은 새벽시간까지 이어지는 음악소리와 각종 음식 냄새, 그리고 카페촌을 찾아온 관광객들의 무질서한 발걸음과 멋대로 주차에 원주민들은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북촌을 떠난 이후 여느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나의 외국인 아내는 늘 북촌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했고, 나는 아내에게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한옥집, 한옥마을로 다시 이사가겠노라고 약속했다. 다행히도 나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도록 요즘엔 우리나라의 가옥에서 한옥을 응용한 다양한 시도와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아파트 인테리어에 한옥장식을 도입한 것에서 부터 한옥식 구조로 꾸미거나, 나아가 친환경적인 한옥기술을 응용해 설계한 아파트까지 건립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무엇보다 한국적이고, 무엇보다 자연친화적인 한옥에서의 삶이 나 뿐 아니라 더 많은 나의 이웃들에게도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건설사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한옥이 다시 우리 품에 돌아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최재영 기자 som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