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nsemble, 108×88㎝ Korean paper Natural dyes, 2019

한 줄기 햇빛이 저 심연의 밑바닥까지 투영되어 영겁의 시간을 일깨운다. 신비로운 그곳에 만물이 소생하는 듯 싱그럽고 탐스러운 초록꽃봉오리들이 오롯이 무리지어 있다. 화면은 생쑥을 살짝 가미한 천연염료가 발현한 녹색초원과 행복, 행운, 장수, 무병, 재물을 상징하는 떡살문양이 하모니를 이룬다.

한국인의 디자인감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심벌로써 떡살은, 오늘날 한지부조 마티에르로 부각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성의 매혹적 숨결로 고스란히 명맥을 전승하고 있다. 이것은 첨단과학디지털시대에 전통적인 것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굉장히 놀라운 회화적 발견이자 곧 한국성의 장식화와 다름이 없다.

그런가하면 저 흘러가는 생의 깊은 회한과 비움의 유장한 선율인가. 어둠 속 무심한 빛줄기가 떨어지듯, 장막이 걷히며 빛이 드러나려는 찰나의, 망망대해 수평선에서 아른거리는 팽팽한 긴장의 물결선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오늘날 현대회화의 특징 중 하나인 어떤 모호함(Ambiguity)으로 밀려든다.

▲ 99×129㎝, 2018

◇한국적 노동의 추상성

작업소재 근간은 옛날 우리농가의 필수품이었던 멍석이다. 30여 겹 한지를 물을 뿌려가며 솔로 두드려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속도와 뚜드리는 힘의 안배는 매우 강도 높은 몸의 노동이자 작업자만이 느끼는 감도의 밸런스가 녹아든 땀의 결정체이다.

거기에 오배자의 보라색, 황백의 연노랑, 도토리의 흑갈색, 빈랑의 인디안 핑크 등 천연염료를 운용함으로써 자연성의 색채가 발현된다. 그리고 마침내 죽처럼 용해된 종이가 스스로 뒤섞이는 혼성(hybrid)은 작가의도와 관계없이 우연성까지 결합됨으로써 새로운 독자적 조형의 결과물을 선사하다. 이것이 바로 전통의 재창조인데 멍석의 반복적인 문양은 오늘날 단색화의 기조인 반복행위와 흡사하게 보인다.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을 즐겨 산책하는 한지작가 박철(Korean paper Artist PARK CHUL) <사진=권동철>

경기도 광주시 소재, 서양화가 박철 작업실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멍석의 세부적 형태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된 인고의 결과물이다. 반복된 노동과 건조되는 오랜 기다림을 통한 결과물은 멍석이라는 기능적 의미는 사라지고 텍스추어(Texture)와 색(色)만 보아지는 추상성으로 변모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적 노동의 추상성을 어떻게 현대화할지를 늘 탐구하고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전통을 새로이 바라보고자하는 것이 작업고뇌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한편 박철 화백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전공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번 개인전은 4월15일부터 26일까지 총20여점의 신작을 선보이며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다도화랑에서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