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영업비밀과 관련한 판례를 하나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법률적인 보호대상인 ‘영업비밀’의 의미부터 분명히 하여야 하는데요. 그 이유는 영업비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상에서도 흔히 사용하지만, 실제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영업비밀’의 범위는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영업비밀’에 대한 정의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부정경쟁방지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영업비밀’이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서, 합리적인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된 생산방법, 판매방법, 그 밖에 영업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또는 경영상의 정보를 말합니다(제2조 제2호). 즉 영업비밀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① 공연히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비밀성 요건), ② 독립한 경제적 가치를 가지며(경제적 가치성 요건), ③ 상당한 노력에 의하여 비밀로 유지된 것(비밀관리성 요건)이라는 엄격한 요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법원의 일관된 태도이며, 반대로 이 중 하나의 요건이라도 갖추지 못하였다면 법률의 보호를 받는 ‘영업비밀’로는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대법원 2004. 9. 23. 선고 2002다60610 판결, 대법원 2008. 7. 10. 선고 2006도8278 판결, 대법원 2008. 7. 10. 선고 2008도3435 판결, 광주지방법원 2008. 4. 8. 선고 2006노100 판결 등 각 참조). 비록 이번에 소개할 판례에서는 그것이 ‘영업비밀’인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다투어지지 않았지만, 실무상 부정경쟁방지법 위반과 관련한 ‘영업비밀’ 관련 사건에서는 그것이 ‘영업비밀’인가가 주요 쟁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어떠한 경우에 ‘영업비밀’로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판례의 사실관계는 이렇습니다. 갑 주식회사는 을 주식회사와 설계기술용역계약을 체결하여 을 주식회사가 건설하는 화력발전소에 관한 설계자료를 작성해 주었는데, 을 주식회사가 신규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을 주식회사와 설계기술용역계약을 체결한 병 주식회사에 위 설계자료를 제공하여 사용하도록 하자, 갑 주식회사는 갑자기 을 주식회사를 상대로 을 주식회사가 비밀유지의무를 위반하였다며 을 주식회사를 상대로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등에 따른 손해배상을 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갑 주식회사와 을 주식회사가 체결한 설계기술용역계약의 계약서에 ‘준공자료는 본 발전소 운전 및 정비에 필수적으로 이용되고, 향후 발전소 건설 시 중요한 참고자료로 이용될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는 점, 발주처인 한국전력공사가 순차적으로 화력발전소를 건설함에 있어 선행호기 설계자료가 후속호기 설계에 사용되었을 때 후속호기의 발주자나 설계용역사가 선행호기 설계용역사에게 그 이용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거나 별도의 사용승낙을 받은 예가 없었던 점, 갑 주식회사 역시 다른 주식회사로부터 위 설계자료를 제공받을 당시 별도의 사용승낙을 받거나 대가를 지불한 사실이 없다는 점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을 주식회사가 병 주식회사에 신규 화력발전소의 설계 목적 범위에서 위 설계자료를 제공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것에는 갑 주식회사의 묵시적인 승낙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영업비밀을 보유한 갑 주식회사가 거래 상대방인 을 주식회사, 더 나아가 을 주식회사로부터 영업비밀을 전달받은 병 주식회사에게 영업비밀을 사용해도 좋다고 승낙하는 의사표시는 일정한 방식이 요구되지 않고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법원의 판단은 ‘영업비밀 보유자가 거래 상대방에게 영업비밀을 사용하도록 승낙의 의사표시를 묵시적으로 하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법원이 애당초 ‘위 설계자료를 영업비밀로 인정하였는가’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결론적인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영업비밀 보유자가 거래 상대방에게 영업비밀인 위 설계자료를 사용해도 좋다고 묵시적으로 승낙한 것’이나, 애당초 ‘그것이 영업비밀이 아닌 것’이나 영업비밀 보유자가 거래 상대방에게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수 없는 것은 매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논리 구성의 측면에서 보면, 위 설계자료가 화력발전소를 순차적으로 짓는 과정에서 참고자료로 널리 활용되었거나 별도의 대가 지불 없이 한국전력공사의 발주를 받은 업체들 간에 공유되었다는 등의 내용은 언뜻 ‘영업비밀’의 요건 중 ‘비밀성’이나 ‘비밀관리성’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론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판결의 논리 구성면에서는 조금 다르게 볼 여지가 있는 사건이고, 대부분의 ‘영업비밀’ 관련 사건처럼 법원은 위 설계자료가 ‘영업비밀’인가의 문제부터 검토되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