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지인이 용산의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필자에게 자문을 구해왔다. 그의 재테크 지역이 효창동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런저런 도시풍수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번 칼럼에서는 효창동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효창동(孝昌洞)의 한자는 효도할 효 창대할 창이다. 이름이 효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제22대왕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가 있었으며 1944년 10월 9일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문효세자(1782~1786년)는 3살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1786년(정조 10년)에 5세로 요절했고, 같은 해 9월 14일 의빈 성씨도 세 번째 출산을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정조에게는 슬픈 이야기지만 필자에겐 ‘왜 각별했던 문효세자 묘 터를 이곳으로 정했을까’라는 생각이다. 이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조선시대 초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만리창계(萬里倉契)로 불렸다. 1914년에는 경성부 금정(錦町)으로 불렸고,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된 뒤 1946년 효창동으로 바뀌었다. 만리창은 새창 또는 신창(新倉)으로도 불렸다. 새창마을이란 명칭이 아직 남아 있고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창고개라 한다.

일본군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효창원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 후 주변 일대에 주둔했다. 청일전쟁 시 주요 거점으로 삼았을 만큼 지리적 지형적으로 특별한 곳이었다. 지금도 이 지역을 가보면 많은 주거지가 언덕에 있다.

고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인근의 산 기운을 찾아보니 북쪽 방향으로 북악산, 인왕산 서북으로 안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산이 가깝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산들을 따라 효창동까지 현재의 거주지들이 오르락내리락 형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산의 기운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풍수적으로 산의 기운이 확실히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없다고도 단정할 수 없다. 이것은 뒤에 일어나는 후사(後史)를 봐야 한다.

실제로 1960년대부터 1990년 정도까지 효창동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유명한 터였는데 이유는 효창운동장에 있다. 서울역에서 가깝고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효창운동장은 1960년 10월에 개장되었고 총면적 2만7593㎡의 대지에 2만5000명에 가까운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현재는 다른 지역의 개발과 신축 운동장의 증설로 인해 과거의 위상을 많이 잃었다.

또한 이곳은 효창공원이 있는데 이 면적이 상당히 놀랍다. 문효세자의 묘를 위해 만들어진 터였는데 면적이 12만3307㎡이다. 현재 효창동이라는 지역의 면적 대비로 보면 상당한 규모다. 과거엔 일본군이 야영지로 사용했고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고 한다. 공원의 북쪽 높은 동산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묘소가 있고 동쪽 다른 동산에는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 3의사(義士)의 묘가 있다. 세 의사의 유해는 1946년 6월에 일본에서 봉환되어 국민장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공원 정문 오른쪽 언덕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으로,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차이석(車利錫) 3위의 묘가 있다.

효창동에 많은 독립운동가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음택지로서 왜 그곳에 안장했는지를 풍수가로서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터는 풍수이론인 형세론적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의 줄기가 내려와 수도 인근에 머리 또는 꼬리가 위치해 있다. 또한 앞에 한강을 바라보는 데 있어 산으로 가로막힌 곳이 없어, 해당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한강과 경복궁, 광화문을 바라 볼 수 있는 훌륭한 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