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총장님도 유류비 지원 안되는데요…”

2014년 1월 어느 날, 서울 마포에 위치한 국제구호개발 비영리재단(NGO)에 마케팅 부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그 전날까지 난 광고쟁이였다. 90년대 중반에 시작해 NGO에 입사한 그 날까지 20년 넘게 광고인으로, 그것도 AE라고 불리우는 기획직군에서 일했다. NGO 면접 때 난 광고대행사 부사장이였다. 그래서 입사 확정 후 인사과에 물어본 첫 질문이 주차와 유류비 지원이었고 그 대답이 재단 CEO인 총장님도 지원이 안된다는 것 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근처 유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내 돈으로 기름 넣으면서 다녔겠지만, 그러기에는 NGO 연봉은 매우 낮았다. 전 직장의 50%정도 받았는데 그것이 업계 최고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대중교통 밖에 없었다. 뚜벅이 생활의 시작이었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편도 30키로 정도다. 기름값이 부담스러워 시작한 대중교통 출근은 버스 두 번 그리고 지하철 한번으로 나를 인도했다. 적응은 그리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버스가 내 근처에 정차하지 않으면 뛰어 타지도 못했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서서 운전기사를 원망했다. 학생도 아니고 내가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뛴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왠지 챙피해서였다. 그런데 뚜벅이 5년차인 지금, 나는 뛴다. 그래야 편하게 서서 갈 수 있는 공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류장 어느 곳에 대기하고 있어야 가장 적게 뛰면서, 빨리 버스에 승차 할 수 있는지 그 위치도 숙지하고 있다. 또 몇 시, 몇 분 지하철의 몇 번째 칸에 타야 사람이 적으며, 퇴근할 때는, 자리에 앉아 있는 승객 중 어느 승객이 어느 역에서 내릴지 대강 알아볼 수도 있게도 되었다. 그 앞에 서 있어야 조금이라도 앉아 갈 수 있기 때문인데, 사실 실패한 적이 더 많다. 여하튼 처음과 비교하면 대단한 발전이다.

NGO를 졸업하고 난 광고마케팅 컨설팅 회사를 창업 했다. 창업한 후에도 난 계속 뚜벅이로 살아가고 있다. 사실 차를 타고 출근하나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하나 시간이 비슷하다면 굳이 내 차를 갖고 다닐 이유가 없는 거다. 물론 대중교통도 단점은 있다. 불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얻는 이익에 비하면 감수할만한 불편이다. 뚜벅이의 장점도 많기 때문이다. 그 중 제일은 사람구경이다. 지하철로 또 버스로 돌아다니다 보면 노선에 따라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들의 모습도 또 삶도 다르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이런 미세한 차이를 보는 것도 참 재미나다.

그런데 요즘에 눈에 띄는 부류가 생겼다. 내 연배 보다 조금 더 되어 보이는 분들인데, 공통점은 백팩을 메고 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분들의 직업이 궁금해 지는 거다. 나야 광고대행사를 다니다 보니 양복을 입지 않고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다닌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럼 저분들도 다 나 같은 분들일까? 잘 모르겠다 지하철 타고 가다 보면 이런 분들 중 블록체인이나 비트코인 이야기 하시는 분도 많다. 지하철에서 이건 뭘까 생각 하다가도, 아마도 저분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맹활약했던 사회에서 아직 졸업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존 사회 구도에서 해답을 찾으시려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난 그 방법이 틀렸다고 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분들이 살아왔던 영역과 좀 다른 영역도 사회에는 존재 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것 뿐이다.

사실 나도 아직 그 사회 속에 있다. 하지만 몇년뒤에도 이 사회 속에서 지금과 같은 생활이 가능할까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자신도 없다. 그래서 사회가 만든 기존 프레임에서 나와서 내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내 프레임이 뭔지, 무슨 프레임을 만들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른다. 단지 그런 프레임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만 안다. 그래서 내 주장은 간단하다. 그걸 지금부터 준비하자는 거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 해보고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체험해보자는거다. 직업 체험과 적성 찾기는 청소년만 하는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도해야 하는 첫번째 과업이 있다.

요즘 내가 제일 많이 쓰는 앱은 서울버스랑 네이버지도 앱이다. 카카오 버스로 바꾸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서울버스 앱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 퇴직 후 제일 적응 안되는 게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해보니 대중교통 이용은 나한테 쌓여 있는 직장인의 때를 뺄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대중교통은 내 인생의 두번째 단추를 채우기 위한 첫번째 과업인 것 이다. 대중교통 이용,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게 회사의 주인공으로서의 나를 졸업시키고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두번째 단계를 시작하는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386과 뚜벅이, 이제는 다시 만날 때가 되었다.

추신) 앱 만드시는 분들. 제발 앱UI나 기능 자꾸 바꾸지 마시라. 익숙해져서 쓸만하면 또 바꾸고해서 점점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시는 것 같은데, 그런 분들에게 루츠 슈마허의 “난 단지 토스터를 원했을 뿐” 이라는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