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중 무역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고 나섰다. 워싱턴포스트(WSJ) 등 주요 외신은 30일 미국 상무부가 중국 푸젠진화반도체에 대한 미국 기업의 수출을 제한하기로 했으며, 여기에는 지식재산권 보호라는 대의명분이 깔렸다고 보도했다.

미국 상무부가 푸젠진화반도체 사태를 주도하며 "UMC가 미국 마이크론 자회사에서 D램 기술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지난 7월 푸젠성 푸저우시 중급인민법원은 마이크론 메모리 반도체 제품 26종의 판매를 금지한다고 판결했다. 지난해 말 마이크론이 미 캘리포니아 법원에 푸젠진화반도체와 UMC가 자사 기술을 탈취했다고 소송을 건 후 중국에서 공수를 바꾼 신경전이 벌어진 셈이다. 두 나라에서 벌어지던 법적 공방전이 이번 푸젠진화반도체 사태의 일차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루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중국과 미국은 장기간 경제무역, 투자, 협력의 역사에서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으나 중국은 자국 기업이 외국에서 투자나 경영을 할 때 현지 법률과 법규에 따라 협력하도록 했다"면서 "미국이 중미 상호 신회 증진과 협력에 유리한 일을 해야 한다. 반대로 나오면 안된다"고 비판했다.

▲ 마이크론과 관련된 지식재산권 분쟁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출처=마이크론

미중 무역전쟁의 행간
푸젠진화반도체 사태의 기원을 살피려면 미중 무역전쟁의 흐름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의도, 시진핑 주석의 장기집권으로 대표되는 중국몽의 실현, 이에 따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한 미국의 반발 등 다양한 요인이 뒤엉켜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단순한 경제적 분쟁이 아닌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선언하며 보호 무역주의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대국굴기'가 충돌, 일종의 신냉전 초입으로 보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실제로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8월20일 미중 무역전쟁을 분석하며 "단순한 무역전쟁이 아니다"면서 "중국의 부상을 막으려는 미국의 신 봉쇄정책"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의 ICT 기술 대국굴기를 경계한 미국의 행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중국 국무원은 2015년 양회를 통해 스마트 제조 2025 프로젝트를 발표한 바 있다. 총 3단계로 이어진 중국 제조업 발전 계획이자 국가 혁신 계획이다. 1단계는 2015년부터 2025년까지 양적인 제조강국에서 벗어나 질적인 스마트 제조 플랫폼을 가진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다. 노동집약적 제조국가에서 스마트 팩토리 등 자동화, 인공지능 전략을 구사해 제조 인프라를 개선하는 방향이다.

2단계는 2026년부터 2035년까지 글로벌 스마트 제조 시장에서 최소한 중간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며 3단계는 2036년부터 2045년까지 글로벌 무대를 석권하는 것이다. 중국은 스마트제조 2025를 위해 9개의 세부목표를 세웠다. 제조업 혁신력을 제고하고 IT기술과 제조업의 융합, 친환경 제조업 육성 등이 포함됐다. 10대 전략사업은 IT와 로봇, 에너지, 스마트팜 등 미래IT기술을 총망라하며 5대 중점 프로젝트를 통해 큰 그림을 그렸다.

스마트 제조 2025를 필두로 하는 중국의 ICT 대국굴기가 성공할 경우 미국은 차세대 경제 부문에서 무한의 잠재력을 가진 경쟁자를 맞이하게 된다. 최근 크게 흔들리고 있으나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마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경우 미국의 글로벌 패권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올 수 있다.

2015년 3월 미국 의회 외교위원회에 특별 보고서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헨리 키신저 수석 연구원인 로버트 블랙윌과 애쉴리 텔리스가 작성한 '미국의 중국 전략 수정'이라는 보고서에는 중국의 팽창에 대비해 미국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전략이 담겼다. 중국을 가상의 적국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미국 외교정책과는 결을 달리한다. 두 수퍼파워의 격돌은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지식재산권...미국의 매력적인 카드
미국은 다양한 이유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으나, 미국이 가지고 있는 무기 중 '지식재산권'에 특히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번 푸젠진화반도체 사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미국은 미중 무역전쟁을 시작하며 중국 기업이 자국의 기술을 무단으로 탈취한다는 프레임을 꺼내들었다. 실제로 미국은 8월 초 중국에 160억달러 규모의 추가 관세폭탄을 던지며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한 대응조치”라고 강조했다. 중국이 미국의 지식재산권을 무단으로 탈취한 것이 미중 무역전쟁의 중요한 변곡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지식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외국기업에 규제를 선언한 것은 푸젠진화반도체가 처음이지만, 사실 미국은 비슷한 프레임으로 외국 기업을 압박한 사례가 있다. 대표사례가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 시도 실패다. 브로드컴은 올해 초까지 퀄컴을 인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트럼프 행정부의 반대로 끝내 실패했다. 모바일 AP를 비롯해 통신 네트워크의 강자인 미국 기업 퀄컴이 중화권에 뿌리를 둔 브로드컴에 인수될 경우 치명적인 국부 유출이 벌어질 것이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계산이 깔렸다. 지난해 11월 퀄컴 인수합병을 제안하는 한편 본사를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옮기며 트럼프 대통령의 극찬을 받았던 브로드컴은 닭 쫒던 개 신세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ZTE 제재도 마찬가지다. ZTE는 지난 2017년 3월 이란과 북한에 대한 수출 금지령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미국은 4월16일 ZTE를 대상으로 7년간 미국 기업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를 발표하며 압박했고 ZTE는 크게 휘청였다. ZTE는 5월9일 홍콩증권거래소에 '회사의 영업활동이 중단됐다'는 자료를 보낼 정도로 존립을 위협받았다. 미중 무역전쟁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5월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제재 조치가 일부 해제됐으나 ZTE는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의 거래를 빌미로 ZTE를 압박했으나, 이면에는 중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과실만 챙기고 있다는 '괘씸죄'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중국 반도체 성장판에 대못을 박다
미중 무역전쟁의 연장선에서 두 수퍼파워가 지식재산권 프레임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최강의 무기'를 빼들었다. 바로 푸젠진화반도체 사태다.

현재 중국은 반도체 시장에서 단연 두각을 보이고 있다. 칭화유니그룹 등 중국 업체들은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 파상공세를 벌이고 있다.  샌디스크와 마이크론 인수에 실패했으나 칭화유니그룹은 지난해 7월 XMC를 인수합병하며 세운 창장메모리를 통해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 후베이성 지방펀드, 후베이성 과학투자 공동투자건설 등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13차 5개년(2016~2020년) 계획에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로 규정하고 정부 차원의 막강한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향후 10년간 약 170조원을 반도체 산업에 투자할 방침이다.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 정부 차원의 국부펀드인 국가IC산업 투자기금은 초기 자금규모만 약 21조원이다. 세계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 내에 적어도 26개의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전망이다. 중국은 2015년부터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40%로 늘릴 계획을 세웠다.

중국 반도체 굴기가 아직 큰 위협은 아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지나치게 포장됐다는 반론도 만만치않다. 그러나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이미 액션플랜에 돌입했다는 평가다.

이 대목에서 미국 상무부가 푸젠진화반도체에 직격탄을 날린 장면은,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반도체 시장의 성장판에 대못을 박았다는 평가다. 푸젠진화는 대만의 파운드리 기업인 UMC로부터 기술을 전수받고 있으며 내년부터 D램 양산에 나설 계획이지만 이번 미국 상무부의 조치로 사실상 손발이 묶였다. 미국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만약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푸젠진화반도체와 거래를 중단할 경우 푸젠진화반도체는 물론 중국 반도체 업계 전체에 상상하기 어려운 피해가 불가피하다.

미중 무역전쟁이 전개되며 중국이 글로벌 부품 서플라이 체인을 무기로 꺼내들려는 움직임을 보인 상태에서, 미국이 먼저 비슷한 조치를 취한 것도 눈길을 끈다. 여기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중국의 ICT 대국굴기, 특히 반도체 굴기를 막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엿보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사이익'
미중 무역전쟁의 연장선에서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코스피 지수는 29일 한 때 2000선이 밀리며 크게 고전했다. 국내 경제 전반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가운데 수출 효자종목인 메모리 반도체 부문도 불안하다.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종료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기록했다.

푸젠진화반도체 사태가 반등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D램 기준으로 보면 현재 메모리 반도체 업계는 일종의 '버블'이 만연하다는 평가다. 엘피다의 파산과 도시바 매각 등으로 공급선에 차질이 생긴 가운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올랐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가격이 다시 하락하는 등 불안요소가 보이고 있으나 푸젠진화반도체 사태를 계기로 중국 반도체 전반에 경고등이 들어오는 순간, 국내 반도체 업계는 그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릴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