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야구가 한창이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포스트시즌 즉, ‘본선’ 진출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예선 탈락이라는 말처럼 허무한 단어를 찾기도 힘들다. 본선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는 것은, 그게 어떤 스포츠든 경연이든, 허탈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예선 탈락이란 말은 수모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몇 년 전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아온 A양은 졸업 후 의학전문대학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여대생이었다. 가족이 함께 진료실에 앉아있으면, 그 집안의 가풍이나 친밀도가 직접 느껴진다. 화목함이 향기처럼 전해지는 가족들도 있고, 반대로 불편해 보이는 가족들도 있다. 얼굴에 ‘칼을 대는’ 수술에 반대를 하는 부모가 동행한 경우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A양과 어머니는 부러울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서로 간에 깊은 이해와 애정이 묻어났다. A양은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면서도 항상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엄한 교육의 결과물이 아니라 진심에서 묻어나는 애정과 존경의 표시로 느껴졌다. 알고 보니 A양의 어머니는 필자의 대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학연, 지연, 혈연에 얽매이면 안 되겠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동시대에 공부했다는 사실에 친근감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다.

어머니는 자신도 돌출입인데, 딸만은 꼭 수술을 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차 A양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칼럼에도 썼듯이 맞선을 100회 넘게 본 필자도 제법 해줄 이야기가 많았다. 결혼을 전제로 사람을 만날 이유는 없지만, 연애는 해보고 싶은 청춘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불쑥 나온 이야기가 필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어떤 과 오빠가 저한테 이러더라구요. 넌 예선 탈락이야.”

A양은 이 말을 하면서도 역시 밝게 웃었다. 그런 모진 말에 체념한 듯 밝게 웃는 모습이 필자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진정 남자들은 아름다운 영혼보다 그 위에 덧씌운 아름다운 육체와 외모에 더 열광하는 것인가? 남자는 다 짐승인 걸까?

어떤 어머니든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딸은 금쪽 같겠지만, A양의 착하고 바른 천성은 그녀의 어머니가 ‘보증’했을 뿐만 아니라, 잠시 상담했을 뿐인 필자에게도 전해져왔다. A양이 들은 ‘예선 탈락’이란 모진 말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너는 참 좋은 사람이어서 본선에만 진출하면 누구나 인정해줄 텐데, 그냥 첫눈에 남자들이 예선 탈락시켜서 참 안타깝다’는 뜻일 것이다(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숙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과 선배는 예선 탈락이 아니고 퇴장감이다).

필자가 밝고 착한 A양에게 해줄 수 있는 시나리오는 돌출입, 윤곽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의학전문대학원에 합격을 한 뒤에, 공부로 바쁜 와중에 많은 훈남들의 대시를 받고, 그중에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현명한 아내로, 유능한 의사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너무 심심한 결말인가?).

돌출입이나 양악수술 대상인 환자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와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는 상상 이상이다. 예선 탈락이란 말은 A양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그녀에게 본선 진출, 아니 결선 진출을 하는 삶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가슴 속의 뜨거운 무언가에 대해 필자는 상담 당일날 바로 글로 남겨 포스팅을 해놓았다. 그리고 얼마 후 예선 탈락녀는 필자에게 돌출입 수술과 턱끝 수술, 광대뼈, 사각턱 수술을 받았다.

착하고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수술 후 회복도 빠른 것으로 느껴진다. 똑같은 상태에서 더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의학적으로도 엔돌핀과 같은 호르몬이나 면역체계에 관여하는 인터페론 감마, 킬러세포 등 유익한 물질들이 나옴으로써 감염으로부터 보호될 뿐만 아니라 더 빠른 회복을 도와주고 통증이나 불안도 덜어준다고 한다.

수술 후 6주가 되었다. 수술 후 6주에는 돌출입 수술을 한 뼈가 거의 다 붙는 시기이고, 어느 정도 최종결과와 비슷한 입매와 윤곽선이 보이게 된다. 그때 A양과 같이 보호자로 온 사람은 A양의 아버지였다. 풍채가 좋은 A양의 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필자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제가 예선 탈락 A양 아버지입니다.

딸이 상담을 다녀간 후, 그녀의 아버지가 필자가 쓴 ‘예선 탈락’ 이란 글을 읽은 것이었다.

딸을 결선 진출하도록 만들어주고 싶다는 필자의 졸필을 이미 봤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 필자의 진정성을 알아준 것이 가슴 뭉클했다.

더욱 놀란 것은, A양의 아버지가 건넨 두 권의 책을 받았을 때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저자의 이름과 약력을 보니, 세상에… 서울대 의대 대선배였다.

필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이쿠… 선배… 제가 몰라 뵀습니다.

-하하 아니에요. 여하튼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책을 여러 권 집필한 의대 대선배가, 필자의 글을 읽어주고 기억해주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한편으로는 저명한 의사이자 교수, 학자이자 저술가인 선배가 당신의 귀한 딸 수술을 필자에게 믿고 맡겨준 것이 더없이 고마웠다.

몇 년이 흘렀다. 대선배인 A양의 아버지를 다시 우연히 만난 것은 어느 장례식장에서였다. 조문 온 교수에게 인사를 드렸다. 딸은 의전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의대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과 커플로 알콩달콩 연애도 한다고 한다. 시나리오의 퍼즐이 맞춰져 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예선 탈락녀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아름답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본선에 넉넉히 진출해 있다.

예선에서 탈락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사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은 남과의 싸움이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일 것이다. 우리가 늘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이다. 돌출입을 가진 사람들에게 남의 시선보다 자기 만족이 더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