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980년대 금융의 발흥, 금융 혁신 그리고 강력했던 M&A 파도를 논하면서 마이클 밀켄(Michael Milken)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그 시대에 가장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정크본드(Junk Bond)를 통해 월가를 제패한 그는 금융의 천재, 그리고 미국 경제의 영웅으로까지 평가받았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왕(King)’이란 호칭을 붙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혹자는 밀켄을 가리켜 J. P. 모건 이후 미국 금융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밀켄은 어떻게 정크본드의 제왕으로 미국 금융시장을 호령하는 왕좌에 올랐는가? 그의 삶과 비즈니스, 그리고 그가 일으킨 금융 혁명의 시작과 몰락을 살펴본다.

밀켄은 평범한 중산층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위치한 엔치노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밀켄은 10살 때 아버지를 도와 수표를 정리하거나 수표책을 맞추는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소득 신고까지 도와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 능력이 뛰어나서 학교 친구들을 좌절시켰는데, 머릿속으로 아주 복잡한 계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UC 버클리 대학에 진학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버클리 시절, 그는 전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총재였던 브래독 힉만(Braddock Hickman)이 저술한 신용(Credit)에 대한 연구에 빠져들었는데, 1950년대에 발표된 힉만의 논문 ‘회사채의 가치와 투자자의 경험(Corporate Bond Quality and Investor Experience)’은 신용 등급이 우수한 투자 포트폴리오보다 신용 등급이 낮은 투자 포트폴리오가 리스크를 감안하더라도 더 좋은 수익률을 제공한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 글은 후일 밀켄의 운명을 이끄는 논문이 됐다.

밀켄은 UC 버클리를 졸업하자마자 학교 시절 친구였던 로리 핵클과 결혼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로 이사했고, 밀켄은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 스쿨(Whaton School)에 진학했다. 그러나 힉만의 논문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와튼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다. 졸업 후 그는 투자은행인 드렉셀 번햄 램버트(Drexel Burnham Rambert)에 취직했다. 당시 그는 필라델피아 근교의 체리 힐(Cherry Hill)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매일 버스를 타고 드렉셀의 본사가 있는 맨해튼으로 출퇴근을 했다.

그는 촉망받는 MBA 출신들이 보통 투자은행의 기업금융(Corporate Finance) 쪽으로 진출하는 것과는 달리 ‘세일즈 앤 트레이딩(Sales And Trading)’ 부서를 희망했다. 그는 그곳에서 등급이 없거나 아니면 저등급의 채권에 관심을 가지고 일했다. 그리고 그 채권들은 그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지었다. 아니 그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자 저등급의 채권을 만나기 위해 그 부서로 갔을 것이다.

매일 왕복 4시간의 출퇴근 버스 속에서 힉만의 글, 그리고 저등급 채권의 수익률과 리스크의 상관관계는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출퇴근 버스 안에서 광부들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랜턴이 달린 모자를 쓰고, 기업들이 SEC에 신고한 채권의 투자설명서와 공시 서류들을 읽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저등급 채권시장에 몰입했다.

결국 그는 정크본드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리던 저등급 채권의 잠재적 가치를 발견하면서 한 시대의 신화를 창조하며 영웅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밀켄이 새로운 비밀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버클리 시절 우연히 힉만의 글을 만났고, 그가 조사하고 분석했던 결과를 이해한 것에 불과했다. 사실, 1900년과 1943년 사이의 회사채 실적을 분석한 힉만은 낮은 등급의 채권의 장기간 포트폴리오가 블루칩 회사들의 포트폴리오보다 오히려 더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고, 위험도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후의 기간인 1945년부터 1965년 사이의 연구도 동일한 결론을 보여 주었다.

힉만 종교의 열심 당원이 된 밀켄은 이러한 특별한 ‘복음(Gospel)’을 열정적으로 전파했다. 문제는 유동성이었다. 고객을 만들어야 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저등급 채권에 대한 리서치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보고서가 널리 거래되고 있는 기업들의 주식에 대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C 등급 채권을 발행한 기업들에 대한 보고서를 밀켄이 직접 작성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해당 기업의 경영진, 제품, 수익 전망이나 현금 흐름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것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밀켄은 두툼한 서류들로 불룩 튀어나온 가방을 들고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즉 투자자들이 고수익 채권에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많은 여행을 했다. 고수익 채권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저평가되고 등급(Rates)이 낮아 가격이 싸지만 상환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의 노력은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일부 부유한 유대인 금융 그룹이 밀켄의 말을 믿고 투자를 시작했다. 그리고 밀켄의 이론은 사실로 입증됐다. 그들의 투자수익률은 밀켄의 예상과 맞거나 그 이상을 넘어섰다. 그들은 밀켄과 드렉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1977년 초까지 밀켄의 비즈니스는 지금까지 월가에서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고수익-고위험 채권에서 25%라는 놀랄 만한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제 밀켄은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그가 달성하고 있는 수익률은 경이적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수익률은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달성한 것이었고, 그의 비즈니스 방법은 레빈, 보스키, 그리고 후술하는 라자라트남과 같이 기업의 내부정보를 빼내어 수익을 올리는 더럽고 불법적인 비즈니스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밀켄은 초기부터 두드러진 성공을 보였고, 그것은 이제 위기를 딛고 합병을 통해 새롭게 출발한 드렉셀에게도 축복이었다. 드렉셀은 1973년 밀켄에게 200만달러를 맡겼는데, 밀켄은 한 해 동안 2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100%의 이익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밀켄과 드렉셀은 정크본드 시장을 개척하면서 매년 놀라운 수익을 기록했지만, 그들에게 1977년은 의미 깊은 해였다. 그해 텍사스 인터내셔널이 자금 조달을 원했는데 회사의 부채가 너무 많아 보통 방법으로는 투자 유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밀켄은 고수익 증권을 ‘공모’로 발행하기로 결정했는데, 투자은행인 드렉셀을 중심으로 하는 제2차 발행이 아니라 일반 투자자를 직접 대상으로 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쉽게 3000만달러를 모집했고 이 거래에서 3%의 수수료를 받았다. 그는 이와 유사한 회사들을 위해 그해에만 6개의 발행을 추진했다. 또한 그는 정크본드와 일반 펀드를 결합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소액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밀켄과 드렉셀은 그다음 해인 1978년에 더욱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다. 그해 드렉셀은 14건의 발행을 주관하면서 4억3950만달러를 팔았다. 이는 전체 시장의 70%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제 드렉셀은 정크본드 시장을 주도하는 강자로 떠올랐다. 월가의 기득권층 바로 눈앞에서 새로운 금융 혁명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밀켄의 혁명은 성공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놀라운 수익률을 안겨 주었다. 정크본드의 상환 불능 리스크까지 감안한 최종 수익률이었다. 자금 조달을 원하는 기업들도 만족했다. 월가의 다른 투자은행들이 할 수 없었던 자금 조달을 밀켄과 드렉셀이 해낸 것이다. 이러한 밀켄의 비즈니스가 성공하면서, 체리 힐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한 그의 긴 여정은 미국 금융계의 역사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광의 정점에까지 올라갔고, 드렉셀은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거대한 자금으로 엄청난 딜들을 성공시키면서 일약 월스트리트 최고 투자은행의 반열에 들어서게 됐다.

 

이 글은 Daniel Fischel, Payback: The Conspiracy to Destroy Michael Milken and His Financial Revolution (HarperBusiness, 1995); Connie Bruck, Predator’s Ball: Inside Story of DREXEL BURNHAM and the Rise of the Junk Bond Raiders (Penguin Group, 1989); James Stewart, Den of Thieves (Touchstone Book, 1991)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