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게임 제조업체 세가에서 1986년에 만든 레이싱 게임 '아웃런'. 사진=유튜브 캡처

[이코노믹리뷰=장영성 기자] "자동차 시합 한판 해볼까?" 80년대풍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 '아웃런'은 오락실에서 친구나 가족들이 한판승부를 벌이는 게임이었다. 특유의 2D 그래픽과 레이싱 기어는 오락실을 방문하는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이 게임은 시대에 뒤처지면서 사라졌다. ‘니드포스피드’, ‘그란투리스모’ 등 새로운 레이싱 게임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명맥을 잇는 것은 레이싱 게임뿐만이 아니다. 바로 오락실에서 조작했던 '레이싱 기어'다. 몇십 만원에서 몇억 원까지 호가를 하는 레이싱 기어는 모터스포츠 선수부터 방구석 게이머들까지 우리 생활 곁에 침투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 ‘F1 황제’ 미하엘 슈마어, 혹은 세바스티안 베텔이 되어 친구가 아닌 글로벌 게이머들과 시합을 겨루고 있었다.

레이싱 게임과 심레이싱(SimRacing)

레이싱 게임은 말 그대로 경쟁상대와 속도를 겨루는 게임이다. 레이싱 게임이라 하면 주로 모터스포츠 장르인 자동차와 바이크 경주를 게임으로 만드는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달리기부터 스키, 수영, 자전거, 경마까지 종류는 다양하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이 레이싱 게임이다.

레이싱 게임은 초창기에 탑뷰(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나, 라인 스크롤 등 눈속임을 이용한 2D 기법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운전자가 자동차를 이용해 느낄 수 있는 조작감이 부족해 인기를 끌었다기보단 새로운 개념의 게임 장르를 보여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러다가 일본 게임 제작사 세가가 1992년 출시한 폴리곤 레이싱 게임 ‘버추어 레이싱’이 출시됐다. 이 게임은 세가 최초 3D 레이싱 게임이다. 이 게임이 오락실을 비롯한 여가 장소에서 인기리에 판매되자, 미국 게임 기업 EA(Electronic Art)가 ‘니드포스피드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본격적으로 3D 그래픽 레이싱 게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 시뮬레이션 레이싱 게임 '그란투리스모 스포트'. 사진=폴리곤디지털

이후 1996년 타이토의 ‘사이드 바이 사이드’에서 실제 존재하는 차종을 게임에 도입한 것이 화제가 됐다. 이에 대응해 등장한 것이 레이싱 게임계 혁명과 같은 존재인 ‘그란투리스모’다. 폴리곤 디지털이 만든 그란투리스모는 일반 레이싱 게임과 다르게 ‘시뮬레이션’에 포커싱을 맞췄다. 리얼 레이싱 게임 선구자라고 불리는 그란투리스모는 레이싱 게임보다 레이싱 시뮬레이터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감 위주로 개발됐다. 예를 들어 주행 중에 오버스티어(뒷바퀴가 코너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현상)나 스핀, 코스이탈 등이 쉽게 발생한다. 차량에 따라서 가속력과 최고속도, 브레이크 성능 등이 다르다. 차종별 배기음과 엔진음까지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란투리스모 이후 콘솔용 레이싱게임은 ‘리얼 레이싱’과 ‘아케이드 레이싱’으로 장르가 세분된다. 그란투리스모와 반대되는 성향을 보이는 게임인 ‘마리오 카트’가 대표적인 아케이드 레이싱 게임이다. 아이템을 이용해 다른 게이머의 레이스를 방해하는 등 다양한 재미 요소가 포함돼 있다. 특히 2명의 게이머 중 한 명은 레이싱을, 다른 한 명은 차에 장착된 총을 쏘면서 게임을 즐기는 등 여타 게임과는 차별화된 아케이드 요소가 많다. 마리오 카트는 리얼 레이싱 사용자들에게 순수 레이싱 게임이라 보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니드포스피드에 이어 레이싱 게임 역사상 판매량 2위를 기록하는 등 게임사에서 기념비적인 자리에 있는 게임이다.

시뮬레이션과 아케이드가 양분하고 있는 레이싱 게임계 공통점은 바로 '네트워크'다. 심레이싱(SimRacing)이라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이용해 게이머들은 일본이나 독일 등 자동차 산업 성지로 불리는 나라의 게이머들과 시합을 할 수 있게 됐다. 평소 시뮬레이션 레이싱 게임 '포르자 호라이즌'을 즐기는 박현준(42) 씨는 "과거와 다르게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게임을 통해 여러 게이머와 시합을 즐길 수 있다"면서 "혼자서 게임을 하는 것보다 몇 배나 즐거운 게임 환경이 만들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레이싱 게임 장비에 대한 욕심도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 로지텍 레이싱기어 'G29'. 사진=로지텍

몇십 만원에서 몇억 까지

레이싱 게임 기술이 개발되면서 함께 성장한 시장이 있다. 그것은 레이싱 게임을 조종하는 ‘레이싱 휠’ 제조업계다. 레이싱 게임 주변기기인 레이싱 휠을 사용하면 게임의 재미가 대폭 상승한다. 일반 모형의 게임 패드나 스틱을 이용한 것보다 세밀한 조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 자동차를 운전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포스 피드백(노면 상황에 따라 휠의 진동 반응)이 패드와 비교해 정교하게 구현돼 있다. 레이싱 휠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차체 떨림과 노면 접지 마찰 등이 진동으로 구분된다.

레이싱 기어산업은 트러스트마스터, 파나텍, 로지텍 등의 회사가 휘어잡고 있다. 트러스트마스터는 레이싱 기어 산업에서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다. 1992년 미국에서 설립된 이 회사는 입문자용부터 고급자용까지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비행 레이싱 시뮬레이션 컨트롤러인 ‘플라이트 기어’까지 판매하는 등 회사가 손을 담그고 있는 게임 영역이 넓다. 1999년 프랑스 컴퓨터 주변기기 제조회사 귈레못(Guillemot)에 인수된 이후 매년 활동 범위를 넓혀오고 있다. 귈레못 회사는 지난해 말 기준 자본금 1177만유로(약 154억원)의 회사다.

모터스포츠 성지인 독일에 기반을 두고 있는 파나텍은 레이싱 기어 산업에서 이른바 ‘명품’으로 불린다. 하이엔드급 제품을 취급하는 파나텍은 세계적인 레이싱 대회 ‘F1 2018’의 공식 스폰서로 지정될 만큼 상표 가치를 인정받는 곳이다. 국내에 파나텍을 유통하는 회사는 GT기어 뿐이다.

플레이시트와 알시트 등과 같은 회사는 레이싱 기어를 고루 취급한다. 가령 레이싱 휠을 사면 거치대가 필요하고 거치대가 있으면 시트가 필요한 법인데 이러한 레이싱 기어의 모든 제품 라인을 다룬다. 제품군이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가격 자체가 합리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이외에 컴퓨터 주변기기를 만드는 로지텍도 가성비가 좋은 휠을 제작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트러스트마스터의 T300RS이 ‘국민 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다. T300RS를 구매해 사용하고 있는 김성우(33) 씨는 “아직 입문 단계이기 때문에 추가로 제품을 구매할 생각도 있다”면서 “전용 거치대나 레이싱 시트를 구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김 씨는 T300RS와 레이싱 게임 전용 페달 ‘T3PA ADD-ON(약 14만원)’을 함께 쓰고 있다.

시중에 출시된 레이싱 휠 중 ▲트러스트마스터 TX150(TMX), T-GT ▲로지텍 G27, G29(G920) ▲파나텍 CSR 등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기가 많다. 평균 100만원을 넘어서는 파나텍을 제외한 레이싱 휠의 가격대는 약 30만~60만원이다. 여기에 전용 페달을 별도로 구매하면 약 50~80만원 수준에 레이싱 기어 세트를 구매할 수 있다. 수동 운전의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기어 스틱을 추가로 구매해도 좋다. 기어스틱은 ‘트러스트마스터 TH8A’이 추천 제품이다. 이는 국내 레이싱기어 유통업체 ‘GT기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기어 스틱이기도 하다.

사실 레이싱 기어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모터스포츠 산업이 발달한 유럽시장에서 레이싱 기어는 유난히 인기가 많은데, 이들은 기본 컨트롤러에 더해 고가의 레이스 스펙 휠(실제 경기에서 쓰이는 레이싱 휠)을 구매해 쓰기도 한다. 여기에 기능키들을 컨트롤 하는 ‘버튼 박스’와 속도 등을 나타내 주는 ‘LED 데이터 디스플레이’ 까지 구입하면 장비 가격은 배로 뛴다. 특히 레이싱 휠 전용 거치대를 구입해 실제 차량에 탑승한 것과 같은 상황을 연출해낸다던가 모니터 3대를 이어 붙여 몰입감을 키우는 게이머도 더러 있다. 이러한 장비는 일반 자동차 구매가를 쉽게 웃돈다.

레이싱 기어 구매 연령층은 10대 후반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게임’이라는 재미 요소를 기반으로 각종 차종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레이싱 기어 유통업체 투비네트웍스 글로벌의 정현식 본부장은 “10대는 입문 모델인 로지텍 제품을 선호하고 20대에서 40대는 중급 이상(약 50~100만원)사이 장비를 구매한다”면서 “50대와 60대 구매자들이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은 파나텍이나 알시트 같은 하이엔드 급브랜드에 과감히 투자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