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2004년 9월 <역사의 종말>로 잘 알려진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위험한 사상으로 트랜스 휴머니즘을 꼽았다. 그는 왜 인류가 과학기술, ICT 기술로 진화의 나선을 과감히 벗어나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위험하다고 봤을까?

트랜스 휴머니즘을 자처하는 이들은 기술의 맹목적인 발전이나 진화를 맹신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트랜스 휴머니스트인 닉 보스트롬 옥스포드 대학 교수는 “인류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현재의 우리 모습이나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열망이나 경험, 삶의 종류에 있다”면서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트랜스 휴머니즘에 대한 이견이 갈리고 있다. 출처=이코노믹리뷰 디자인

비판과 지지의 사이에서

트랜스 휴머니즘을 위험하다고 보는 이들은 기술의 진보나 발전이 마냥 평등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한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을 즐기며 바이오 공학의 발전으로 수명연장을 꿈꾸는 이들은 대부분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 진화의 과실을 독점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1급시민과 2급시민으로 나뉘는 극단적인 세상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인류의 역사는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며 헤아릴 수 없는 변수를 뚫고 변화해왔다. 이런 상태에서 단순한 직진에만 탐닉해 과정의 학습을 부정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현재의 인류가 누리는 모든 문명과 정신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만들어진 균형의 산물이며, 이들은 이 균형을 인위적으로 파괴할 경우 엄청난 후폭풍이 올 것임을 경고한다.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삶은 죽음이 있기에 가치가 있으며, ICT 기술로 이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판단하는 순간 모든 선순환 체계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 교수는 트랜스 휴머니즘에 대해 “주어진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며 우리의 개방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트랜스 휴머니즘의 핵심 도구인 ICT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삶을 도우며, 이 과정에서 인류와 과학의 경계가 지나치게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에이 아이>에는 사람과 동일한 감정과 외형을 가진 인공지능 아이 데이빗이 등장한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의 가정에 입양된 데이빗은 평범한 인간처럼 생활하지만 불치병을 이겨낸 진짜 아이가 돌아오며 쫓겨나고 만다. 트랜스 휴머니즘이 인류의 기술 진보를 촉진하지만, 이 과정에서 명확한 철학이나 도덕적 관념을 만드는 작업을 선행하지 않으면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트랜스 휴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은 인류의 진화와 발전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인류 그 자체에 집중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트랜스 휴머니즘이라 주장하고 있다. 트랜스 휴머니즘을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하는 ‘과정의 오류’도 정신과 육체의 초월로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트랜스 휴머니즘, 시도는 계속된다

아직 트랜스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은 광의의 의미로만 이해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토론이나 의견 개진도 상대적으로 미비하다.

중지를 모으기 위한 시도는 제한적이지만, ICT 기술의 발전이 의미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트랜스 휴머니즘의 존재감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우리가 기술의 발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미래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일자리 문제를 살펴보자. 1970년대에 ATM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은행 직원이 모두 해고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은행원이 감소하기는커녕, 1980년도에 50만명이었던 은행창구 직원이 2010년이 되자 10%나 증가했다. ATM이 도입되어 은행 지점 운영비가 감소하자 은행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지점 수를 늘리며 직원들을 고용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은행은 현찰 관리와 같은 저부가가치 업무 대신 신용카드, 대출, 투자 등 고객 관계 중심적인 서비스를 도입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기술이 발전하며 일자리의 구조도 변한다. 19세기 초반 산업혁명 당시 방직기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생각으로 발생한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 운동’은 이런 우려가 행동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발전했다.

문제는 예측 불가능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에도 계속 비슷한 선순환 효과가 발생할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불안전한 인류는 역사를 항상 앞으로만 당겨오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트랜스 휴머니즘을 꺼내보면, 역시 양 극단의 주장만 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순간이다. 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느냐, 새로운 고통을 만드느냐의 문제를 두고 이 과정에서 불거지는 다양한 파생 효과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길 외에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계속 시도되는 트랜스 휴머니즘의 가능성 타진이다. 극단의 주장만 펼치지 말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어렵고 느리지만 중요한 갈지자 행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