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실장. 사진=이코노믹 리뷰 임형택 기자

[이코노믹리뷰=장영성 기자] 중화학공업은 한국 경제의 중추다. 1970년대부터 정부가 수출성장을 주도하고 새로운 수출품의 개발을 요구하면서 중화학공업이 성장했다. 당시 국가 경제 성장률 두 자릿수를 넘나드는 힘은 중화학공업에서 나왔다. 중화학공업은 이후 30여년 가까이 우리나라의 10대 수출품이자 국내 총생산과 고용 등 거시경제 지표를 좌지우지하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힘이 빠진 모습이다. 올해 5월 기준으로 제조업 가동률은 글로벌 금융위기(69.9%) 이후 최하 수준인 70%대로 하락했다. 중화학공업 밀집 지역인 울산과 창원, 거제, 목포, 군산 등에서는 공장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실직자가 쏟아지고 실업률이 치솟고 있다. 국내의 대표 대기업인 S사 관계자는 “신입사원 때 월급이 가장 많았다”며 중화학공업의 위기를 전했다. 정부가 2015년부터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중화학공업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한지원(41)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기술개발 정체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사정의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기술혁신을 위해 기존 체제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의정부 출신인 한지원 연구실장은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객원연구원, 금속노조 한국GM사무지회 정책자문위원,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미래전략위원회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한 중공업계를 속속들이 아는 전문가로 통한다. 그는 한국GM 군산공장 폐쇄에 따른 '한국GM 사태' 당시 날카로운 문제 지적과 통찰력으로 여론에서 주목을 받았다. 현재 노동자연구소 연구실장 외에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실장이 중화학공업 위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코노믹 리뷰 임형택 기자

중화학공업, 과잉설비 추격성장 한계 봉착

한지원 연구실장은 중화학공업의 위기를 맞은 이유로 과잉설비를 꼽았다. 한 실장은 “위기의 시작은 과잉설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설비 규모를 확대해 경쟁력을 키웠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이 바뀌면서 장기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했다. 특히 중국 중화학공업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우리나라 기업 먹거리가 줄었다. 당연히 설비가동률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중화학공업의 가동률 저하는 이윤 급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현재 위기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GM이 올해 2월 폐쇄한 군산공장을 대표 사례로 들었다. 군산공장 폐쇄는 연 500만대 생산규모의 자동차 설비를 유지할 능력이 없음을 방증한다고 그는 꼬집었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규모 자동차 공장 폐쇄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군산시민은 물론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1970년대 이후 자동차 공장들은 재무 위기에 빠지더라도 공장만은 가동했다. 아시아차 공장은 기아차로 넘어가고 기아차 공장들은 현대차로 들어갔다. 또 대우버스 공장은 영안모자에, 대우차 승용차 공장, 대우트럭 공장, 삼성차 공장, 쌍용차 공장은 해외 기업들에 팔렸지만 그래도 공장은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까지였다.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었다.

한 실장은 “과잉 설비 위기는 자동차 산업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조선업은 가동률이 떨어진 몇 년 전부터 구조조정을 거듭하고 있다. 이 때문에 10만명 가까운 직·간접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정부가 20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조선업에 투입했으나 상당수 중형조선소는 폐업했다. 조선업 종사자들이 직종을 바꾸는 사례가 숱하게 나오고 있다.

그는 또 20년 넘게 한국 10대 수출품에 이름을 올리는 철강산업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최근 몇 년간 중형 철강기업들을 중심으로 설비 폐쇄를 계속했는데도 가동률은 70%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철강 같은 설비산업은 가동률이 낮으면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다.

석유화학 공업도 이렇다 할 방도가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한 실장은 “이 산업은 설비 규모와 가동률이 경쟁력의 전부라 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중국이 석유화학 생산능력을 확충하며 자체 수요를 충당하기 시작하면서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설비규모 확장은 조선업과 철강업에도 위협 요소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한국 중화학공업 위기의 본질을 추격성장 한계로 풀이했다. 우리 중화학공업이 한계에 봉착한 이유는 1970년대 이래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으며 성장해왔는데, 이제 따라 할 수 있는 기술이 많지 않은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한 실장은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술을 따라 할 때는 실패확률이 낮다. 안정된 기술을 선택할 수 있어 개발 비용이 적고 개발 속도가 빠르다”면서 “반면 없는 기술을 만들 때는 성공보다 실패가 많아지고 개발 속도도 더뎌진다. 기술개발 비용은 기하급수로 증가한다. 심지어 개발비 전체가 매몰되는 사태도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기업들은 이 지점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계의 기술이 치고 나갈 힘이 없는 가운데 중국 기업들이 우리와 기술격차를 줄이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실장. 사진=이코노믹 리뷰 임형택 기자

과감한 투자로 기술혁신하는 전략 마련해야

‘연구개발비 투자로 추격성장을 이겨낼 방도가 없나’는 질문에 한 실장은 “국내 기업들은 선진국 기업과 다르게 개발비 투자에는 인색하다”고 일갈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자동차가 투자하는 연구개발비는 폭스바겐의 25%, 토요타의 절반에 못 미친다. 연구개발비가 적은 이유는 추격 성장에 익숙한 개도국 기업의 특성과 혁신보다 경영권에 집착하는 국내 재벌기업의 기질이 걸림돌이라고 질타했다.

한 실장은 “독일 자동차업체 폭스바겐이 연구개발에 10조를 투자하면 이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지만 현대자동차가 같은 시도를 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결과를 바라긴 어렵다”면서 “이미 개발할 만한 기술들은 전부 선진국 기업이 독점한 상태다. 현대차가 최근 협업에 나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 조선업 빅3(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가 침체의 골을 탈출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기술 부족이라고 그는 결론내렸다. 빅3는 미국과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등 해양플랜트 선도 국가 기업의 핵심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매출을 기록 중인 한국 조선사에 쉽게 기술을 내주는 해외 기업은 없다. 한 실장은 “결국 빅3는 추격성장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철강과 석유화학도 마찬가지다. 철강이나 석유화학은 기술개발이 핵심인 산업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국의 자본 투자가 이어지면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첨단소재로 출구를 찾고 있지만 선진국과 소재 개발능력 격차가 크다. 30년 전처럼 쉽게 기술이전을 받을 수 없는 데다가 신기술 도전에도 소극적인 게 철강과 석유화학업계다. 한 실장은 “정부 독점 기업을 인수한 재벌들이 철강과 석유화학을 지배하고 있다”면서 “지대추구 경영에 익숙한 이들이 추격성장 이후를 준비하기는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위기를 해결할 방안은 없는가? 이에 대해 한 실장은 “당장은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해결 방안을 만들기 위해 미래를 보고 중화학공업의 현재 상황과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선 정부와 기업의 빅딜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업은 과감하게 투자하고 정부는 고용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석유화학 업계에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노동자가 많다. 특히 1970년대 만들어지고 1980년대 성장한 기업들은 은퇴를 앞둔 사람들이 회사 곳곳에 포진해 있다. 정년을 앞둔 노동자에게 10년 이상 장기 대책을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 한 연구실장은 “이는 노동조합이 움직일 수 없는 제약조건이기도 하다”면서 “노후보장과 사회안전망이 구축돼야 기업이나 노동조합의 혁신도 그 폭이 넓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실장은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다. 중화학공업이 무너지면 국내 경제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고 할 수 있다”면서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중화학공업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리스크가 다소 있더라도 긴 안목을 갖고 새로운 제도의 틀을 만들어야 하는 게 중화학공업과 우리나라가 직면한 냉엄한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화학공업을 중소기업 위주로 키우려는 정책은 옳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국내 중소자동차부품업체를 만나보면 대부분 미국과 일본의 라이선스를 받아 부품을 찍어낼 뿐 기술개발 능력이 부족하다. 이렇게 만들어낸 부품은 다시 현대자동차와 같은 국내 자동차 기업에 들어간다. 현대·기아차의 위계 하청구조 속에 하청으로 30년 넘게 지내온 부품사들은 낮은 기술력과 낮은 생산성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한 실장은 “대기업이 투자에 나서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면서 “이때 고용과 관련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대책과 중장기 전망을 노동자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사정의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모두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실장은 “우리나라가 1970년대부터 이어온 성장 방식은 이제 써먹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정부는 어젠다를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정부가 최저임금과 고용증대를 기업에 요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구조개혁이 동반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또 “기업도 양적 투자보다 질적 투자를 시도해야 한다”면서 “리스크와 매몰비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한국 경제 중추를 세우려면 도전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