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스톡홀름 은행에 4명의 무장 강도들이 침입했다. 강도들은 은행직원들을 인질로 삼고 무려 6일간이나 경찰과 대치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인질들이 자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경찰을 경계했으며, 오히려 경찰을 적대시하며 증언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 중의 하나인 <완전한 사육>은 신주쿠 여고생을 납치한 사건인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한 중년 남자가 여고생을 납치해서 감금했다. 처음에 여고생은 극렬하게 반항했지만, 점차 중년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로 발표됐는데, 자칫 이런 시도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생길까 우려되어 범인이 호된 죗값을 치르게 되는 시리즈도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 1970년대 미국의 테러집단인 공생해방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한 재벌가의 딸인 퍼트리샤 허스트는 아예 테러집단과 뜻을 함께하여 범죄를 공모하는 일도 있었다.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강도나 납치범 또는 테러집단에 동조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사람에 따라 극한의 상황에서 심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해치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범인들로부터 오히려 친절과 온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범인이 쥐고 있는 인질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불가항력적으로 당연시하면서도, 그들이 가끔씩 보이는 호의에는 마음이 쓰이다 보니 오히려 그들에 동조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료들보다 차라리 외부 사람들이 편해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는 조직일수록 커뮤니케이션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목소리를 높일수록 그렇게 강조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기는커녕 도리어 사람들은 숨어버린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파티션도 모자라서 그 주위를 책장으로 둘러치고, 키가 큰 화분을 가져다 놓거나 그것도 아니면 책상 서랍을 놓아 그 위에 책이나 서류함으로 방어막을 친다.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키보드와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마치 머리만 모래 속에 파묻고 있으면 맹수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타조와도 같다.

특히 경기가 좋지 못하거나 매출이 신통찮은 시절엔 비용을 줄인답시고 회식도 없애버리는 회사들이 많다. 게다가 효율적인 업무를 강조하면서 집중적으로 근무해야 한다는 시간에는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화장실 가는 것마저도 자제해 달라는 요구를 내걸면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

관리자급으로 승진하게 되면서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 평소와 달리 팀원들이 키보드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이유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연결된 메신저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를 때는 직원들이 그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을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고 뿌듯해 하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배신감만 더해질 뿐이다.

예전에는 도통 자리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늘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한참을 수다를 떨다 오는 직원들이 문제라고 탓하기도 했다. 특히 한번 통화가 시작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수시로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모습이 언짢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다가 더 진화해서 일을 하는 것인지 수다를 떠는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시절이다.

이미 모니터에는 보안 필름을 대서 조금만 각도가 틀어져도 모니터에 무슨 내용이 떠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때문에 그 직원들의 바로 등 뒤가 아니라면 한 발짝만 떨어져 있어도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도 힘든 시절이다. 그렇다고 매번 누군가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가서 감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아무리 소통하라고 해도 도대체 소통이 안 되네요’

누구나 직장에서 그런 경험을 했겠지만, 회사에서 하는 행사 치고 정말 가보고 싶은 것은 별로 없다. 늘 듣던 이야기를 또 반복하니 지겹고, 항상 이야기하는 사람만 떠들고, 듣는 사람들은 감흥이 제로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소통이고 커뮤니케이션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 해에 두 번 있는 시무식과 종무식, 월에 한번 있는 월례조회, 그리고 어쩌다 진행되는 분기 경영설명회 정도지만, 초중고 시절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듣는 얘기도 거의 흡사하다. 어릴 때 듣던 것은 ‘자율학습 시간에는 교실에서 조용히 하라’는 표현이고, 커서는 ‘집중 근무가 필요한 시간에는 업무에만 열중하라’는 표현으로 다듬어진 정도다.

황당한 것 중 하나는 ‘소통을 잘 하라’며 직원들을 질타했던 것으로, 생각할수록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조직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조직 구성원 각자에게 그런 DNA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커뮤니케이션 활성을 통해서 조직이 발전하는 것을 체험하고,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래서 그 기업의 문화적 체질화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엔 담임 선생님이 철없던 어린 아이들을 앉혀놓고 늘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고 당부를 하곤 했다. 선생님 말씀은 철칙과도 같았기에 아무리 미워 보이는 친구가 있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교실에서 떠들거나 장난치는 친구에게 ‘선생님이 떠들지 말라고 하셨잖아’라는 말이면 다 통했다. ‘선생님이 사이 좋게 지내라’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사이좋게 지내야 했다.

그 상황과 한 치도 다름없어 보이지만, ‘회장님이 소통 잘 하라고 하셨잖아요’라며 주위에 이야기할 어른은 없다. 초딩과 어른의 차이다. 요즘은 초딩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지 않는다. ‘왜’와 ‘어떻게’라는 것에 대한 납득이 이루어져야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하물며 어른들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조직 내에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유는 분명하다.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건지는 경우가 많고, 내키지도 않고 귀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그러지 않는데, 내가 나서서 그러기가 뭐한 경우가 많아서다.

회사 내부 사람들과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거래처, 고객, 기자, 애널리스트 아니면 투자자와 대화하는 것이 더 속 편할 경우가 많다. 어쩌면 한 번 보고 그 뒤로 다시 볼일이 없거나 그들도 역시 동병상련식의 마음으로 통하기 때문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자꾸만 귀찮고 힘들게 하는 아군보다는, 차라리 적과 이야기할 때가 더 편할 수도 있다.

연구에 의하면 조직 내에서 20%는 변화에 저항하고, 60%는 무관심하다고 한다. 나머지 20%만 겨우 변화를 받아들인다고 하는데, 시작 단계에서 직원들은 대부분 신뢰를 보내지 못한다. 누구라도 조직이 성공적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경우는 잘 없었기 때문이며 한번 시도된 변화가 지속해서 성과로 이어진 적 없이 중단되거나 번복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처음부터 변화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낼 수가 없다.

변화가 더 진행되면 구성원들은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느낌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무기력한 상황에까지 이른다. 구성원들은 조직이야 어떻게 되든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오직 자신만이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게 된다. 이런 조직에서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가 없다.

어떤 시도가 몇몇의 희생으로 성과를 가져왔을 때도 그 다음 상황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간다’는 말처럼 고생한 구성원은 있지만 어떤 권한이나 보상은 돌아가지 않고, 그 다음 번에도 수고로움의 대상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 결코 자기 개인의 성공으로 이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은 ‘소통하라 했는데 하지 않는다’고 불평만 늘어놓기 십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