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여 전인 1990년대 초반에 필자가 지은 원죄(原罪)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녁 9시 TV뉴스에서 필자가 인터뷰한 내용 때문이다.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가장 국제화, 세계화에 앞장선 대우그룹! 박창욱 인사과장을 만나 보았습니다. 토익(TOEIC) 점수는 어느 정도? 700점입니다.”

그러나 속 내용은 좀 복잡하다. 회사 홍보팀에서 뉴스 인터뷰를 권했다.

“우와! 나에게 이런 기회가?” 왜 안 하겠는가?

기자가 왔다. 이어지는 인터뷰 내용이다.

“대우는 어떤 사람을 뽑나요? 정신이 똑바른 사람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지요? 자신감을 가지고 똑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글로벌 사업을 하는 회사이니 넓은 포용력과 다른 문화 수용성도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영어를 잘해야 하겠네요. 물론이지요. 인성을 기반으로 한 영어능력이면 됩니다. 그러면 영어점수는요? 영어점수요? 보통 이상이면 되지요. 혹시 토익으로 하면 몇 점 정도면 됩니까? 너무 점수로 말하지 마시지요. 그래도, 점수로 표현하면 쉽잖습니까? 그래요? 토익으로 한 700점 수준입니다.”

기자가 돌아가는 길에 “너무 편집하지 마세요”라고 하니 “네. 잘 나올 것입니다! 하고 갔다.

그날 저녁에 전 가족이 TV 앞에 앉았다. 가문의 영광이기에. 어린 나이에 9시 뉴스에 나온다. 그런데 정작 “토익점수는 어느 정도? 700점 수준입니다”가 전부다. 아뿔싸. 점수로만 표현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항의를 하니 “오늘 뉴스가 넘쳐서 많이 잘렸다”고 한다.

‘태도와 포용력’에 중점을 준 대화가 ‘토익 700점’에 방점이 찍힌 것이다.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토익이라는 질문에 ‘700점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라고 답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스펙 망령으로 휘감기는 계기를 준 원죄다.

그 이후 뚜렷하게 영어자격시험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여러 가지 자격증이 확산되어 이른바 ‘스펙(SPEC)’의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업에서는 토익점수를 요구하고 대학가에서는 토익시험이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분위기로 급격히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 * * *

 

인재를 고른다는 엄정한 자리가 영어 성적만 가지고 당락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점수를 설정하고 그 이상은 합격선에 두고 판단을 한다. 오히려 스펙이 과도한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다. 대학생활 동안 인간관계를 넓히고 여러 가지 경험으로 세상을 대하는 요령 등을 익히기보다는 학원, 도서관 등을 오가며 오로지 책상머리에서 외우기에만 시간을 보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똑같고 대학에서 그 긴 방학이라는 시간을 주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넓은 세상을 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폭을 넓히라는 의미일 것인데.

실제로 뽑아보니 학점, 토익 등의 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관계 능력이 지극히 떨어진다는 실제 근무성적 피드백 결과도 있다.

면접 후에 채용담당부서에서 실무적으로 당락을 심사하는 과정을 좀 더 보면, 최저선을 넘은 사람 중에 기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탈락을 시켜 합격계획인원에 모자라면 50점, 100점 단위로 하향조정을 해서 심사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면접관에게 학교, 학점, 토익 등은 기본을 통과한 사람들이니 무시하고 사람만 보라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한다.

 

* * * *

 

영어공부를 하지 말자는 말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대학생활에 영어를 최우선으로 두고 토익공부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취업목표(산업, 직무), 주변과의 인간관계, 관련되는 경험을 늘 균형감 있게 가지고 가며 준비하라는 것이다. 외국어, 학점, 자격증 등은 최소한의 선으로 유지하면 된다. 주기적으로 습관화해 숨 쉬고, 밥 먹고, 물 먹는 정도의 수준으로 유지하라는 것이다.

영어점수와 관련한 몇 가지를 추가하고자 한다.

 

1. 점수 자체에 대한 미신(迷信)

지난 10여년간 대기업의 평균 토익점수가 790~800점이다. 이 점수를 통계학 기본지식으로 보면

- 800점 이상이 절반, 800점 미만이 절반이라는 뜻이다.

- 만점을 990점으로 보면 610점에서 790점대로 합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00점대, 700점대는 어떻게 합격했을까? 이전 칼럼에서 언급한 태도, 자세와 좋았고 지원회사에 대한 집중연구, 현장방문 등으로 남다른 지원자의 면모를 보여 주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2. 강점인가? 약점인가?를 보는 상대적 측면

- 토익 650점이면 강점인가? 약점인가? 라고 질문을 하면 무조건 약점이라고 대학생들은 대답한다. 그러나 그 회사나 어느 사업부문이 국내사업만 있고 해외사업 경험이 없어 재직인원의 평균점수가 550점 수준이라면? 거기에 지원자의 대부분도 600점 전후다.

- 토익 900점이라면? 강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회사 지금 직원들의 평균점수가 920점대라면? 실제 그런 회사가 있다. 재(再)보험 회사인 ‘코리안리’라는 회사의 경우다.

3. 점수를 받는 과정의 노력과 연계 판단

- 혼자서 틈틈이 공부해서 750점, 10개월 어학연수 갔다 와서 830점. 누굴 뽑겠는가? 대개의 면접관은 750에 손을 든다. 절대 점수가 아니다.

- 모든 스펙의 질적 요소를 보기 위해 면접이라는 과정이 있다.

‘입사는 입시가 아니다’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25년 전의 TV인터뷰를 한 다음날 아침에 전화가 왔다. “어제 인터뷰 잘 들었습니다. 사진을 기념액자로 준비했습니다. 받으실래요?” 필자도 모르게 준비를 해서 영업을 하는 것이다.

“얼마인데요?” “3만원입니다” 일반 상황이면 만원 수준의 액자와 사진이다.

“헐! 이렇게도 털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