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양인정 기자] 시진핑(習近平)의 복심, 왕치산(王岐山) 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중국 국가부주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가 앞으로 무슨 역할을 맡든 시진핑 주석의 일인천하 기반을 공고히 하는 `사실상 2인자`가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왕치산 국가 부주석은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만장일치로 국가주석으로 재선출된 시진핑에 이어 찬성 2969표, 반대 1표라는 압도적 지지로 선출됐다.

홍콩의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는 왕치산 부주석의 선출로 시진핑 주석의 두 번째 임기가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SCMP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당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왕 부주석이 지도자 그룹에 제대로 안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외교 문제와 관련해 경험이 풍부한 고위급 당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며 국제 문제에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내다봤다.

이 때문에 향후 중국은 왕 부주석을 중심으로 미국과 대담한 관계를 유지하고 국제적 관계에서 중국이 과감하게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당내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시 주석에게 왕 부주석이 ‘카운슬러’ 역할을 하며 아마도 경제 정책과 부패 방지에 노력하고 서구,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그동안 중국 당국자들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왕 부주석의 재기용은 대미 관계관리에 집중하겠다는 시주석의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퇴임 5개월만에 정계에 복귀한은 시주석의 정책적 선택이상의 의미가 있다.  69세의 고령인데도 7상8하(67세면 정치국에 남고, 68세면 정치국을 떠난다)를 뚥고 복귀한데다, 공산당 중앙위원이 아닌데도 부주석으로 선출되는 `파격 인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왕 부주석은 1948년 7월 칭다오에서 출생했다. 1971년 산시성 박물관에서 근무했고, 1973년 시베이 대학에 입학해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등 관료 초기에 역사관련  일에 종사했다.

1988년부터는 중국 농촌 신탁투자공사 총경리, 건설은행 부행장, 인민은행 부행장 등 약 10년 동안 금융계에서 일한 금융정책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방론자이면서 시장주의자로도 평가된다는 점에서, 그의 복귀로 향후 중국의 개방정책은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주요 외신들은 전했다.

특히 그는 현대 중국 경제의 해결사 역할을 줄곧 해왔다. 지난 1990년대 중반에 21%까지 올라갔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데 나섰고, 1998년 은행들의 파산으로 이어진 금융위기와 2003년 사스 사태 해결도 진두지휘했다. 그의 별명을 ‘소방대장’또는 ‘폭탄제거전문가’로 부르는 것은 이 같은 과거 행적에서 유래한다. 공직생활에 청렴성을 강조해 ‘포청천’이라고도 불렸다.

왕 부주석의 독서량은 매우 방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서와 사서에 조예가 깊고 학술서적과 문학 소설에 관심이 많다. 그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재직 당시 기율위 위원들에게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 빌이 쓴 ‘앙시앙레짐과 대혁명’을 읽도록 권유하는 등 공직사회에 독서를 장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진핑 집권 1기에 그는 중국 최고 사정기관인 기율위 서기를 지내면서 시주석의 정적 제거가 앞장선 시진핑의 `호위무사`를 자임했다. 

풍부한 행정경험과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으로 시주석의 집권2기를 안정시키는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