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최근 취재를 위한 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당시 보고 느낀 소감을 강연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경기도 지역의 중소기업 대표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미국과 글로벌 ICT, 전자업계의 동향을 설명하는 한편 소위 4차 산업혁명에 가까운 최신 트렌드를 나름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때. 마이크를 잡은 손을 내리고 물을 마시려는 찰나 강연장 정면에 앉아 있는 청중과 눈이 딱 마주쳤다. 늘어지게 하품하는 그의 표정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라는 불만 반, 지루함 반의 감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공이 부족하고 이야기 솜씨가 미치지 못하여 생긴 파국이리라.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강연이 끝나고 청중 한 분과 대화하면서 말했다. 다들 지루해하는 것 같다고. 그분이 빙그레 웃으며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대기업에 납품하는 부품공장 대표들입니다. 글쎄요, 4차 산업혁명이니 구글이니 애플이니… 잘 와닿지 않네요.”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경제는 물론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이 ICT 기술의 발전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중이다. 취재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곤혹이다. 하루 지나면 새로운 것이 빵빵 터지니 이슈 따라가다가 날 샌다. 조금만 방심하면 트렌드를 놓치고 도태될 수 있는 위험한 시대이기도 하다. 제3자 입장에서 취재하는 기자가 이럴진대, 당사자들은 얼마나 머리가 아플까. 이 기회를 빌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급격한 변화의 바람 속에서 한때 기술이야말로 이 시대의 최고 가치라고 생각했다. 인간존중이라는 기본적인 가치만 지키면 기술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최근 이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살고 근무하기 때문에 주로 수도권 지역을 취재한다. 자연스럽게 오찬을 겸한 IT 종사자들의 모임이나 스타트업 네트워크, 데모데이에 참여하거나 취재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말들은 말 그대로 ‘기술=이 시대의 최고 가치’다. 모바일과 O2O, 초연결 사물인터넷과 특별한 사용자 경험을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진다.

반면 지방은 상황이 다른 것 같다. 가끔이지만 서울 외 지역에 소재한 기업들이나 산업 클러스터 지역 사람들을 만나면 최첨단의 IT 기술을 논하며 구름 위에서 놀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는 체험을 한다. 당장 제조현장에서 활용해야 하는 부품 라인, 대기업에 납품해야 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질, 식각장비 이야기나 심지어 직원 기숙사 이야기까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든가 ‘사람을 키우면 서울로 보내라’ 등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수도권에만 모바일과 최첨단 ICT 솔루션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일반 제조업의 현실은 이상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본다. 이들에게 4차 산업혁명, 스마트팩토리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아무리 중앙 정부에서 목청껏 부르짖어도 그 목소리는 수도권 외 지역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도 해보고 훌륭한 분들과 토론을 한 적도 있다. ‘수도권과 비 수도권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결국 ICT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다’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바로 지역 거점 마피아다.

범죄조직 마피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페이팔 마피아 같은 창업, 육성 생태계를 각 지역별로 엮어보자는 뜻이다. 페이팔 마피아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유대 창업 생태계와 실리콘밸리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폐쇄적 플랫폼이다. 우리 사정에 대응하는 것은 어떨까. 각 지역별 산업의 특성을 따져 밀어주고 끌어주는 다소 폐쇄적인 창업, 육성 생태계를 다수 만드는 방식이다.

물론 비슷한 정책은 있다. 각 지역 산업단지 등이 있고 전 정부 당시 지역의 창조경제혁신센터도 비슷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각 지역 산업단지에 ICT를 체계적으로 이식해 하나의 생태계를 만든 적은 없다. 또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역별 거점 생태계 창출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는 있었지만 지역 연고가 있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거점을 만들었지, 냉정히 말해 지역 산업의 특성에 ICT를 연결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서울과 비 수도권의 능력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첨단의 ICT 시대가 도래하며 비 수도권 지역의 속도가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 분위기는 분명히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수도권 집중현상 해결 등 원천적인 문제부터 짚어야 하지만, 지역 특화 산업에 ICT를 접목한 폐쇄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 대기업 중심이 아닌, 말 그대로 지역을 무대로 올리는 방법이다. 곰곰이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