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총화> 성현 지음, 홍순석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펴냄

 

‘용재’는 저자 성현의 호(號)이다. ‘총화’는 이야기 묶음집이란 뜻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 온갖 인물들의 일화가 담겼다. 풍속과 지리, 제도, 음악, 문화, 그리고 웃기는 이야기 소화(笑話)도 다루고 있다. 저술 시기는 대략 서기 15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 시기가 매우 특별하다. 비슷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현의 친형 성임은 <태평광기상절>을 펴냈다. 중국 한나라 때부터 북송(北宋) 초기까지의 온갖 이야기를 기록한 500권짜리 고대 소설집 <태평광기>를 정리했다. 조금 앞서 서거정은 <필원잡기> <태평한화골계전>을 썼고, 강희맹은 <촌담해이>를 펴냈다. 이육은 <청파극담>를 썼다. ‘야담’이란 단어가 처음 쓰인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성현의 <용재총화> 수년 후 등장했다.

특별한 것은 저자들이 한결같이 고관대작들이란 점이다. <악학궤범> 편찬자로 유명한 성현도 화려한 이력의 고위 관료다. 대사간·동부승지·형조참판에 이어 강원도·평안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뒤 대사헌·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성임은 도승지, 공조판서를 지냈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은 대제학을 역임했다. 강희맹은 예조정랑, 이조참의, 진헌부사를 거쳤고, 이육은 충청도·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와 형조·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유몽인은 대사간·도승지 등 요직과 경기도 암행어사·황해도 관찰사에 올랐다.

정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던 시기, 동시에 유교의 엄숙주의가 행동거지를 지배하던 시기에 파한(破閑, 심심풀이)용 저술에 매달렸던 것은 잠시나마 참담한 현실정치를 잊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같은 시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며 유럽이 꿈에 부풀었던 것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일이다.

<용재총화>는 336편의 이야기로 전한다. 기실(記實)·골계(滑稽)·기이(紀異)·잡론(雜論) 등으로 분류돼 있는데, 그 안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고려 충선왕은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정들었던 여인이 있었다. 귀국할 때 그녀가 따라오려고 하자 왕은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삼았다. 귀국 후 그녀를 잊지 못한 왕은 문신 이제현을 시켜 원나라에 가보게 했다. 여인은 왕을 기다리며 식음을 전폐한 채 다락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초췌한 모습의 여인은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썼다. 하지만 익재는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남자들과 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왕은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이듬해 경수절에 이익재가 죽을 죄를 지었다며 뜰 아래 엎드렸다. 왕이 놀라 물으니 그제서야 이익재는 여인이 써준 시를 왕에게 바치고 당시의 일을 아뢰었다. 그러자 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만약 그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원나라로 돌아갔을 것이오. 하지만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딴 말을 했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마음이라고 하겠소.”

훗날 蓮花(연화)라고 전해진 그 여인의 시는 이러했다. “贈送蓮花片 初來的的紅(증송연화편 초래적적홍),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사지금기일 초췌여인동)” “떠나실 때 주신 연꽃 한 송이/처음엔 분명하게 붉더니/가지(줄기) 떠난 지 이제 며칠/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당시의 조선인을 중국인과 비교한 대목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간교하고 의심이 많아 서로를 믿지 않는다. 중국인은 의심이 없어 비록 외국인과 상거래를 하더라도 다투는 법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은 작은 일에도 경솔하고 조급하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많아도 성취하는 일이 별로 없다. 중국 사람은 말이 없어 사람이 적더라도 쉽게 일을 성취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마시고 먹는다. 군대가 출정하게 되면 식량의 운송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관직에 있는 자는 관청에 와서 조반(早飯, 아침식사 전 간단하게 먹는 식사), 조반(朝飯, 아침식사), 주반(晝飯, 점심식사)을 먹으며 술은 때를 가리지 않고 마신다. 중국 사람은 많이 먹지 않는다. 군졸은 말린 식량을 말 안장에 걸고 다니며 굶주림에 대비한다. 관직에 있는 자는 공경대부라 할지라도 집에서 고기와 밥 한 그릇을 챙겨와 관청에서 먹는다.

우리나라 백성은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관리는 선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비는 대부(고위직 관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위아래가 서로 업신여기고 질투심에 간사한 계책을 부려 모함할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백성이 관리를 두려워하기를 표범 같이 하고, 관리는 공경대부 두려워하기를 귀신 보듯 하며, 공경대부는 임금 두려워하기를 하늘같이 하는 까닭에 일이 맡겨지면 잘 처리하고 명령을 내리면 쉽게 복종한다.”

성현은 1504년 정월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수개월 지나 연산군 주도의 ‘살육극’ 갑자사화가 일어나 성현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는 중종이 즉위하고서야 신원되어 청백리에 선정됐다. 그의 영욕의 삶도 <용재총화>에 실릴 만 했다.